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소설 '정막개'와 작가 최명근, 흥미롭고도 처절한 인간의 탐구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소설 '정막개'와 작가 최명근, 흥미롭고도 처절한 인간의 탐구

빛무리~ 2018. 4. 26. 14:28
반응형


정말 오랜만에 소설 한 권을 아주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토록 독서를 좋아했건만, 어느 순간 인터넷과 영상 자료들이 전해주는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들면서 독서의 은근한 재미를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고 느꼈던 작품들은 이제 너무 딱딱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졌고, 새로 나오는 작품들 중 대다수는 가볍거나 유치하게 느껴졌다. 아, 물론 이것은 작품들의 문제라기보다 이미 독서에 흥미를 잃어버린 나의 내면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심히 집어든 소설 '정막개'는 이런 나의 심드렁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고, 나는 엄청난 속도와 집중력으로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삽시간에 독파했다.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짜릿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작가 최명근의 범상치 않은 인생에도 나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우 출중한 글쓰기 실력을 지녔으나 평생 자기 이름으로 책 한 권을 출판할 수 없었던 비운의 작가였다. 1936년생인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9명의 동생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병역기피자가 된 최명근은 평생토록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고액의 상금이 걸린 각종 문학상 공모에 응모했고 수차례에 걸쳐 당선의 영예를 안았지만, 모두 동생들의 이름을 빌려서 된 일이었다. 1966년에는 한국일보 주최 추리 소설 공모에 동생 최정협 이름으로 낸 ‘흙바람’이 당선됐고, 이는 1967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인연으로 한국일보 주간 여성 기자로 발탁돼 16년 동안 근무했으나, 그 때조차도 최명근이라는 본명을 쓰지 못하고 최정협이라는 필명으로 일했다. 


평생 미혼인 채 타인의 이름을 빌려 글을 쓰고 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는 1996년 홀로 세상을 떠났다. 간략한 일대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올 만큼 외로웠던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9년의 세월이 흐른 2015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책이 출판되니 그것이 바로 소설 '정막개'다. ‘정막개’는 1982년 경향신문이 2000만원 고료를 내걸었던 장편소설 공모 투고작이었다. 필명은 ‘최민조’였고 당선작이 된 손영목의 ‘풍화(風化)’와 함께 최종심에 올랐으나 아깝게 탈락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최정협이 임종하기 전에, 평생 보관하던 원고 뭉치를 여동생 부부에게 전달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막개는 조선 중종 시대의 실존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박영문과 신윤무가 죄를 당한 것은 정부에 딸린 종 정막개가 고변한 때문이었다." 로 시작되는 짤막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1513년(중종 8년) 관노 정막개는 전 공조판서 박영문과 전 병조판서 신윤무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고변한다. 이에 박영문과 신윤무는 물론 그 아들들까지 처형을 당했고, 정막개는 공을 인정받아 박영문의 전재산과 노비를 상으로 받고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노비 신분에서 일약 정3품의 당상관이 되었으니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파른 신분 상승이었다.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천박했던 정막개는 무리하게 권세를 휘두르며 더욱 인심을 잃었고, 설상가상 박영문과 신윤무의 역모 당시 그 사실을 알고도 며칠 동안 고변을 늦추었던 사실까지 문제가 되며, 지평 권벌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고변을 늦춘 이유가 원래 역당들과 한패였기 때문일 수 있다는 주장은 특히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결국 정막개는 모든 관직과 상을 박탈당하고 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는데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끝내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짧게 요약된 사실만으로도 정막개는 매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작가 최명근은 이 몇 줄의 자료를 토대로 정막개라는 인물의 캐릭터와 인생을 재구성하여, 무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주인공 정막개는 물론 그 주변의 창조된 인물들까지도 개성이 뚜렷하여 모든 캐릭터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지루할 틈 없는 스토리에는 박진감이 넘친다. 초반부에는 조선시대 최하층 노비들의 리얼한 삶을 엿볼 수 있고,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역모 고변을 둘러싼 아찔한 긴장감과 더불어 인생 역전의 황홀감을 느낄 수 있으며, 후반부에는 인생의 허무함과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몇몇 캐릭터를 꼽자면 어려서부터 정막개의 친구였고 그의 마지막 길을 유일하게 배웅해 준 개도치, 그리고 성참판댁 하녀였다가 정막개의 아내가 된 여인 감정, 중반부에 성참판의 식객이었던 심지 곧은 황녹사, 성참판의 미망인으로서 후반에 정막개의 몰락을 주도한 정경부인 등이 기억에 남는다. 써놓고 보니 유독 성참판댁 인물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여기서 성참판이란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1등 공신이 되고 말년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던 성희안을 가리킨다.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다가 도망친 관노 정막개가 우여곡절 끝에 성참판댁 종이 되면서부터 스토리는 가장 흥미롭게 진행된다. 성참판이 주도한 반정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역할이 크든 작든 그 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을 인정받아 큰 혜택과 상을 받는다. 정막개와 한방을 쓰던 노비 능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지 상전의 말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뿐인데, 반정의 걸림돌이었던 권신 신수근이 칼을 맞고 쓰러질 때 옆에서 그의 피를 덮어썼다는 이유만으로 공을 인정받고 면천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작은 벼슬까지 얻게 되었던 것이다. 


정막개는 능금을 몹시 시기하면서도 그 과정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재빠르게 붙잡기만 하면 얼마든지 인생역전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현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소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정막개는 '숨은 뱀'과 같은 존재였다. 그 와중에 무슨 조홧속인지 착하고 똑똑하여 정경부인의 사랑을 받던 여종 감정은 음흉한 정막개에게 연정을 느껴 깍정이굴로 도망치면서까지 그의 아내가 되고...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역사 속 반정의 이야기를 한 노비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것은 그 자체가 매우 새로운 시도였다. 


최명근이 이 소설을 경향신문에 응모했을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소설가 박완서는 정막개를 가리켜 '천격스러운 인간의 전형' 이라고 평한 바 있다. 과연 정막개는 배은망덕하고 천박하고 잔혹하고 이기적인, 속속들이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저자 최명근도 당시 투고문에서 "역사의 변천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오랜 인물 유형 속에 '남을 밟고 일어서서, 남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 유형이 유구하게 잔존되고 있음을 보고 사람에 대한 절망감에 싸이는 때가 많다. 이런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을 조선 때의 실제 인물 관노 정막개에게서 보고 그 인물을 소설로 형상화해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한 정막개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전혀 그 인물을 미화하거나 주인공의 감정에 휘말리는 일 없이 시종일관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작가 최명근의 능력에 나는 특히 감탄한다. 나 역시 부정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써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주인공의 시각에서 스토리를 진행시키다 보니 왠지 그 입장을 변호해야만 할 것 같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서도 자꾸만 그 감정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은 얼마 못 가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몰입과 열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냉정하고 차분하게 관조할 수 있는 자세임을 느낀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