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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시간' 어른을 위한 동화, 늙어버린 피터팬의 꿈 본문

영화, 연극을 보다

'가려진 시간' 어른을 위한 동화, 늙어버린 피터팬의 꿈

빛무리~ 2016.11.25 11:34

이것은 어른이 되어버린, 결국은 늙어버린 피터팬의 꿈이다. 어린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기를 꿈꾸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보면 머지 않아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되어봤자 별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순수한 기쁨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머나먼 동화 속의 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을, 더 이상 남아있는 삶 속에서는 순수를 기대하거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을 꿈꾸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혼자 어른이 되어버린 성민(강동원)의 존재는 늙어버린 피터팬을 대표한다. 몸은 늙어 버렸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해맑은 소년인... 스스로를 그렇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자화상이다. 현실은 물론 그렇지 못하다. 몸이 늙은 것만큼이나 사실은 마음도 늙고 때묻었다. 추악한 세상을 알만큼 아는 머리는 더 이상 어렸을 때처럼 해맑지 않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모두 믿고 싶어한다. 늙고 때묻은 것은 나의 겉모습일 뿐,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진짜 모습은 어린 시절과 똑같음을 애써 믿으려 한다. 


<영화의 내용과 결말에 관한 누설이 있습니다.> 


소년 성민(이효제)과 소녀 수린(신은수)의 우정과 사랑은 더없이 맑고 깨끗하고 풋풋하다.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성민과, 엄마를 잃은 채 새아빠와 살고 있는 수린은 지독히 외로운 고아들이기에,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친해지는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만 13세의 이효제와 비교했을 때 15세의 신은수는 너무 완연히 누나 티가 나서, 동갑 친구라는 설정이 썩 와닿지는 않았다. 아역 배우 캐스팅에 다른 묘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친한 누나와 동생으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성민과 친구들(태식, 재욱)은 멈춰진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수린은 홀로 남겨지는데, 며칠 후 성민(강동원)은 어른이 된 모습으로 돌아온다.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성민에게는 15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천식을 앓고 있던 재욱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자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고, 태식(엄태구)과 성민은 15년 동안 멈춰진 세상 속에서 단둘이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태식은 자살하고 말았다. 따라 죽으려던 성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시간이 흐르는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데... 


단 둘이만 알고 있는 암호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며 수린은 성민을 굳게 믿어 주었으나, 수린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성민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성민은 실종된 아이들의 유괴범으로 몰리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불쌍한 성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괴롭히는 어른들은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일 뿐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린의 새아빠(김희원)도, 성민이네 고아원 원장선생님도, 형사 아저씨(권해효)도, 그 누구도 이 순수한 아이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 없다. 엄마가 새아빠와 결혼한지 고작 1년만에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사춘기의 딸이 새아빠와 단 둘이 살게 되었다면 왠지 그 설정에서부터 심상찮은 기운이 솔솔 느껴지고, 더욱이 그 새아빠 역할을 악역 전문(?) 배우인 김희원이 맡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린이가 새아빠로부터 성폭행이나 추행 등에 시달리는 비참한 소녀일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 속 새아빠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붓딸에게 그래도 열심히 아빠가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선량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수린이를 방 안에 가둬놓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수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새아빠와 의붓딸이 단 둘이 함께 산다는 그 설정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때묻은 어른들의 전형적인 시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동화적인 세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와 달리 그런 추악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순수와 환상을 믿고 있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른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몹시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성민은 다시 멈춰진 시간 속으로 도망치고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가슴아픈 이별을 맞게 되지만, 성민과 수린은 세상과 어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한 조각 아름다운 꿈처럼 추억처럼 서로를 간직할 뿐이다. 

멈취진 시간 속에서 혼자 나이를 먹은 성민은 어느 덧 머리칼이 희끗한 중년(혹은 노년) 남자의 모습으로, 얼마 후 소녀 수린을 다시 찾아온다. 성민은 세상 속에 부딪히지 않고 혼자 살았기 때문에,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여전한 소년이다. 그는 비록 수십 년에 한 번일망정 그리운 과거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 시절 사랑했던 소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준다. 과연 이것은 늙어버린 피터팬의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현실이라면 그 시절 사랑했던 소녀의 눈가에도 주름이 가득할 것을. 


순수한 동심에 대한 향수, 그리고 멈춰진 시간 속 세상에 대한 상상력, 이 두 가지 외에 특별한 교훈이나 메시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꽃미남 배우 강동원의 환상적 비주얼과 아역 배우 신은수의 풋풋한 미모가 예쁜 CG와 어우러져 동화적(혹은 만화적) 분위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자아낸다. 러닝타임이 좀 과하게 길어서 지루함이 느껴지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불필요한 장면들을 줄이고 좀 더 타이트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뛰어난 작품성을 기대해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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