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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 계향, 이름없는 풀꽃같은 한 여인의 죽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닥터 진

'닥터 진' 계향, 이름없는 풀꽃같은 한 여인의 죽음

빛무리~ 2012. 6. 1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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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 7회의 중심부에서 극을 이끌어간 캐릭터는 진혁(송승헌)과 홍영래(박민영)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흥선군 이하응(이범수)이나 종사관 김경탁(김재중)도 아니었습니다. 이름없는 풀꽃의 은은한 향기와 초록빛을 지녔던 여인... 고달픈 삶 속에서도 고이 간직해 왔던, 오직 하나뿐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진 여인... 기녀 계향(윤주희)이 바로 7회의 주인공이었지요. 드라마 전체를 볼 때 그녀가 등장한 분량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나, 짧은 동안에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불태우고 떠난 인물이 아닐까 싶군요.

 

계향의 캐릭터가 더욱 의미있는 까닭은, 그 인물 자체가 철저한 '약자'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생이란 겉보기에만 화려할 뿐, 사실은 서민보다도 못한 처지의 최하층민이죠. 노류장화(路柳墻花)...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을 누가 사람답게 존중해 주겠습니까? "고뿔이 들어도 잔을 치고, 초상을 당해도 춤을 추고... 기생 팔자는 여덟 팔자(八字)도 안되는 칠자(七字)랍니다..." 기생의 애환을 표현하는 춘홍(이소연)의 대사는 종종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작가는 마치 그 시대의 기생 팔자를 경험이라도 해 본 것처럼 몹시도 리얼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더군요.

 

 

예를 들자면, 지난 회에서 매독 감염 여부를 검사받기 위해 옷을 벗고 누웠을 때, 춘홍은 영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씨는 좋으시겠습니다. 이런 검사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누구인들 담벼락 밑에 피어난 꽃이고 싶었을까마는, 비록 가난한 집일망정 양반가의 울타리 안에 피어나 순결하게 보호받으며 살아온 영래아가씨의 모습이... 춘홍의 눈에는 참으로 부러웠던 게지요. 계향이 죽은 후, 춘홍은 마치 진혁의 정체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꺼내는군요. 그 세상에서는 기생이 아닌 평범한 여인으로 살고 싶다 하였지만, 평범을 욕심내기에는 너무도 특별해 보이는 춘홍입니다. 이 신비로운 여인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깊이있게 다루도록 하지요.

 

아무나 꺾을 수 있다면 또한 아무나 짓밟을 수 있을 터, 그렇게 낮은 곳에서 피어났으면 하다못해 춘홍이처럼 깡다구라도 있어야 버티련만, 계향이는 그저 순하고 여리기만 하니 그저 보기만 해도 안스럽더군요. 춤을 추는 도중에 마구잡이로 얼싸안는 남정네의 손을 요령있게 뿌리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가며 당황한 표정만 짓고 있을 때, 선뜻 나서서 구해준 사람이 흥선군 이하응이었습니다. 한 번 그랬더니 이 철없고 순진한 것은 천하의 파락호 흥선군에게 홀랑 마음을 넘겨주고 말았네요. 첩실로라도 받아준다면 당장 들어앉고 싶었으나, 그녀의 애틋함과 달리 데면데면한 흥선군은 다른 양반님네를 소개해 준답시고 야속한 소리나 할 뿐이었습니다. 하긴 가난한 종친의 신분으로 기생첩을 들이자니 거북한 점도 적지는 않았겠지요. 

 

 

어영부영 헤어진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있던 동안, 계향은 물욕에 눈이 어두운 양반들의 속임수에 걸려 서양인과 관계를 맺고 극심한 매독에 걸렸습니다. 그녀를 양인에게 팔아넘기고 금괴를 싸게 사들이는 방법으로 큰 이득을 본 양반들은, 목적을 이루자 계향을 헌신짝처럼 버렸네요. 두둑한 돈은 커녕, 기적(妓籍)에서 빼내어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해 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뿐이면 다행이겠으나, 듣도 보도 못한 병증으로 몸이 망가지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처량하고 원통한 신세가 있을까요? 바보처럼 의심도 못하고 속아넘어간 자신을 탓할 밖에요.

 

춘홍이가 용하다는 진의원을 모시고 들이닥쳤을 때, 생각지도 않은 흥선군이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계향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꿈에나 그리던 님을 오랜만에 마주하는데 이 흉물스런 몰골이라니, 누구보다도 흥선군 앞에서는 그저 예쁘게 보이고 싶은 한 여자일 뿐이건만 현실은 너무도 잔혹하네요. 그런데 계향의 가엾은 몰골은 흥선군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면서 억눌렸던 사랑이 되살아났고, 계향의 입으로부터 그녀를 이렇게 만든 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분노를 못 이겨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의 원흉은 좌의정 김병희(김응수)의 적장자인 김대균(김명수)이었죠. 영래의 오빠 홍영휘(진이한)에게 의뢰하여 좌의정의 집에서 문제의 금괴를 탈취해 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김병희의 서자인 포청 종사관 김경탁에게 덜미를 잡혔네요. 김경탁은 악착같은 감시와 미행을 통해 결국 숨어서 치료받고 있던 계향을 찾아냈습니다. 서양인과의 거래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시절, 김대균의 범법 행위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으려면 그녀가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토설했는지를 알아내야만 했기에, 잡아오자마자 모진 고문이 시작되었군요.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계향이 잡혀온 것은 병이 거의 다 나아가던 시기였습니다.

 

자기 손으로 역사를 바꾸게 된다는 부담과 두려움에 페니실린 개발을 포기한 진혁이, 이제는 방법이 없다고 흥선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은 계향은 혼자 몰래 떠나려 했었지만 곧바로 진혁에게 붙잡혔지요. 그 때 계향은 죽음을 예감한 듯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남의 노리개로 살아온 인생,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그저 한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볼 것을... 내가 연모하는 이의 눈길 받으며, 그 마음에 취해 살아볼 것을... 단 하루만이라도..." 이 애틋한 고백은 계향의 고백은 진혁의 결심을 바꾸어 놓았군요. 진혁은 눈앞에 있는 그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 제약 작업에 착수합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역사를 바꾸어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가 명백히 형상화된 부분이라 할 수 있겠군요. 

 

 

진혁의 페니실린 개발은 싱거울 만큼 너무 쉽게, 단번에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드라마의 구성상으로는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계향을 위해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희소식이었죠.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며 회복되어 가니 외모부터가 예전의 고운 모습을 되찾는지라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벅찬 기쁨이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굴로 잡혀가고 말았네요. 양인과의 거래를 누구에게 발설했느냐고, 대답만 하면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보장하겠다는데도 그녀는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차마 흥선군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것이죠. 비밀을 안다는 이유로 그도 자기와 같은 신세가 될 테니까요. 모진 채찍질과 인두질에 계향의 온 몸은 피로 물들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영래가 애원하자 김경탁은 잠시 옥문을 열고 진혁이 들어가 계향을 치료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녀의 처참한 몰골에 놀란 진혁이 애써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이미 계향의 관심사는 자기의 생사여부에 있지 않군요. "몸이 부서지기 전에, 마음이 부서질까봐... 흥선군 나으리께 누를 끼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흥선군을 곤경에 빠뜨릴까봐, 계향은 그것만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진혁이 좌의정의 처소에 불려들어가 있는 동안, 계향은 스스로 혀를 깨물어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네요. 그녀로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습니다.

 

 

맞아도 비명조차 지를 수 없고 억울해도 호소할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약자이며 힘없는 자, 천대받는 자였던 기녀 계향은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그녀가 하나뿐인 목숨을 던져 자기를 구해주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시신을 보며 잠시 울먹이던 흥선군은 그 이후로도 예전과 다름없는 파락호 생활을 계속하는군요. 커다란 두 눈이 온통 충혈되도록 울어주던 친구 춘홍도 이제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치 언제 그런 존재가 있었냐는 듯, 사람들 곁에서 사라져간 풀꽃 한 송이... 처음엔 매독 분장을 해서 온통 불긋불긋했고, 나중엔 고문을 당해서 온통 피칠갑을 한지라, 화면 속 계향의 모습은 언제나 붉은 빛에 가까웠는데, 이상하게도 제게는 풀꽃처럼 연한 초록빛의 느낌이 전해져 왔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천한 목숨이라 말하던 계향처럼, 시대가 변했지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상처가 많은 사람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자기 자신을 가치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존중받거나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비록 계향은 죽었지만, 그녀로 인해서 페니실린이 일찍 개발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수많은 사람을 살렸네요. 이름없는 풀꽃처럼 작은 생명인 것 같았는데, 사실은 온 세상을 뒤덮는 큰 생명이었던 거예요. 결코 천하고 작은 목숨은 없다는 것을 계향이가 증명해 준 셈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꾸어도 좋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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