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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 김경탁이 꿈꾸던 소박한 행복, 끝내 무너지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닥터 진

'닥터 진' 김경탁이 꿈꾸던 소박한 행복, 끝내 무너지다

빛무리~ 2012. 8. 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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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김경탁(김재중)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듯 합니다. 서출이라는 태생적 설움은 일찌기 짐작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 슬픔을 디딤돌 삼아 절치부심하고 독하게 노력하여 나중에는 이복형 대균(김명수)의 뺨을 치는 야심가로 성장할 거라고 예상했었죠.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그의 눈빛은 왠지, 작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순한 남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멀어 보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영래(박민영)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도 처음부터 순도 100%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진심이 70~80% 가량은 되겠지만, 나머지20~30% 쯤은 집착과 소유욕 등의 감정도 섞여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김경탁은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마음을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 처음으로 기대는 순간부터, 영래는 경탁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을 테니까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영래이기에, 좀 억지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집착과 소유욕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습니다.

 

 

김경탁은 세상을 보는 눈이 밝고 시비를 지혜롭게 판단할 줄 아는 청년이지만, 절대악(극중에서는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그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김병희(김응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완전히 믿을 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범수)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제 부친의 명을 받고 활약하는 이중첩자였고, 그렇게 악역으로 기울어 가는가 싶다가도 기회 있을 때마다 꿋꿋이 부친을 설득하여 정의로운 선택으로 이끌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안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핏줄에 대한 이끌림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야 하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을 타고났죠. 그러므로 언제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기가 매우 힘든, 최근까지도 위험하고 미스테릭한 인물로 보였습니다. 주인공 진혁(송승헌)을 비롯하여 다른 인물들은 모두 단선적인 캐릭터라서 파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오직 김경탁만은 상당히 복합적인 캐릭터인 것 같았어요.

 

21회에서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김병희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김경탁은 그런 부친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군요. "아버님은 제가 살아가는 마지막 이유입니다! 그 이유마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발 살아 주십시오!" 그 처절한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제가 김경탁의 캐릭터를 적잖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불꽃처럼 뜨거운 눈빛을 지녔어도, 서릿발처럼 차가운 검날을 휘둘러도, 아무리 매섭고 강인해 보여도, 사실 김경탁은 누구보다 작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평범한 남자였을 뿐임을 말이지요. 그는 이제껏 작은 소망 하나를 지키기 위해, 가혹한 운명과 끝없이 맞서고 있었던 겁니다.

 

 

김경탁이 평생토록 간절히 원했던 소망 하나는 오직 사랑뿐이었습니다.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심수봉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불려진 '사랑밖에 난 몰라'는 가장 여성적인 노래에 포함되겠지만, 누구보다 강해 보이는 남자 김경탁의 캐릭터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는 찾을 수 없을 듯 싶군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가 원한 것은 시린 가슴을 토닥여 주는 따스한 손길과 지친 머리를 기댈 수 있는 포근한 어깨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지극히 단순했던 그의 내면에 출세욕이나 야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이 남자는 그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운명의 잔인한 회오리 속에, 그의 작은 소망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군요.

 

세도가의 서자가 아니라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난한 부모와 마주앉은 밥상에서 꽁보리밥에 나물 반찬만 먹고 살아도 김경탁은 아쉬울 것 없이 즐거운 소년 시절을 보냈을 텐데... 어느 날 흰 저고리 검은 치마의 동네 처녀가 그의 훤칠한 인물에 반해서 은근한 눈빛을 던져온다면, 순박한 청년 김경탁은 그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정화수 한 그릇의 가난한 혼례식을 치른다 해도 행복했을 텐데... 뙤약볕 아래 허리 펼 날 없이 고된 농사일을 한대도, 비가 새는 초가집의 작은 방에 날마다 새우잠을 잔대도,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만 있으면 한평생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평범하고도 소박한 행복이 김경탁에게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낳아준 어미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부친 김병희였습니다. 어린 경탁은 그 날부터 부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지요. 피를 물려준 아비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추운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도록 손을 잡아 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마님이라 부르면서도 경탁의 미련한 사랑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자기를 후려치던 아비의 모진 냉대는 돌아서면 잊어버렸지만, 처음 그 손을 잡던 순간의 따스한 느낌만은 평생 잊지 못한 경탁이었습니다. 그 철석같은 마음은 홍영휘(진이한)와 홍영래 남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부친의 냉대와 이복형의 질시를 받으며 외롭게 지내던 어린 경탁에겐 친구가 없었습니다. 양반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고 노비도 아닌, 그 어중간한 위치에서 서성대는 소년에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았는데, 그 외로운 나날 속에서 경탁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유난히 정의롭고 편견없는 성품을 지녔던 홍씨 남매였죠. 그들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경탁은 영휘를 평생의 친구로 받아들였고, 영래를 유일한 사랑으로 가슴에 품었습니다. 역시 그 마음은 이제껏 한 번도 변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럴 거예요. 진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토록 원하던 영래와 혼인하여 인생 최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착한 운명은 경탁의 것이 아니었네요.

 

 

그의 전부였던 영래는 "당신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는 냉정한 말로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떠나갔고, 유일한 친구였던 영휘는 정치적 노선 때문에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경탁은 차마 부친을 버릴 수 없었기에, 자기의 소신을 꺾고 친구를 외면하면서까지 김병희의 곁에 남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무정한 아비는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하는 아들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무참히 짓밟으며 떠나는군요. 이건 정말 사람도 아니네요. 김병희는 죽어가면서 경탁에게 "네가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허울뿐인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온 김병희는 이제 그 욕심을 채울 수 없게 되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껍데기에 집착하는 사람인데, 그저 진실한 사랑만을 원하는 김경탁과 어디가 닮았단 말입니까? 이 인간은 죽으면서까지 멋있는 척 하느라고 뻥을 치네요..;; 

 

삶의 마지막 이유마저 소멸되어 버린 이 불행한 청년에게도 최후가 멀지는 않은 듯합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노래하던 한용운 시인처럼, 영래는 떠났지만 경탁은 아직도 그녀를 보내지 못했거든요. 영래가 강화도의 전쟁판에 뛰어든 것은 진혁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진혁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안스럽게 여긴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죽음이라면 더 이상 진혁을 헛수고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 것이죠. 하지만 그녀를 살리기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칠 사람은 진혁이 아니라 경탁이 될 것입니다. 22회의 예고편에서 김경탁은 프랑스 군대의 총구 앞에 홀홀단신의 검으로 맞서며 진혁을 향해 외치더군요. "낭자를 데리고 어서 피하게. 뒤는 내가 맡겠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지막 남은 목숨 한 방울까지 불태울 수 있다면, 김경탁에게는 차라리 행복한 죽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가 꿈꾸던 소박한 행복은 살아서 이룰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최소한 영래는 비정한 아비처럼 그의 마음을 짓밟고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린 경탁에게 처음 손을 내밀던 날처럼,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줄 테니까... 피로 얼룩진 이마 위에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면, 먼 길 떠나는 발걸음도 그리 무겁지만은 않겠지요. 부디 다음 생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운명을 타고나, 그토록 원하던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잔혹한 운명이라도 한 번쯤은, 단 한 번쯤은 허락해 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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