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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진' 영래를 생각하는 김경탁(김재중)의 마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닥터 진

'닥터 진' 영래를 생각하는 김경탁(김재중)의 마음

빛무리~ 2012. 6. 1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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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노라고... 그녀가 하늘의 도리를 들어 나를 꾸짖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순간 할 말을 잃은 그녀는 글썽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데, 볼썽사나운 눈물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그녀를 외면한 채 황급히 말에 올라 도망쳐 버렸구나.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그녀에게 또 다시 희망을 품었던 거다. 혹시 그녀가 어린 시절처럼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더 이상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전처럼 따스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어린 시절, 오라비 영휘보다도 먼저 내게 다가와 당돌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던 것이 바로 영래, 그녀였다. 흑백이 분명한 그녀의 두 눈동자는 언제나 옳고 그름을 확실히 구분했으며, 할 수 있는 한 약한 자의 편에 섰고 목청이 닿는 한 세상 모든 불의를 꾸짖었다. 그녀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또 그렇게 말하던 내 가슴이 얼마나 쓰라렸는지를.

 

 

내게 주어진 인생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를 그녀는 모른다. 양반 세도가의 핏줄과 노비의 핏줄을 반반씩 이어받은 나에겐, 애당초 어떠한 선택도 더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아비의 세상도 어미의 세상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기에, 나는 어느 쪽 세상에서도 반은 사람이요 반은 짐승인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노력했다. 몇 번이나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 온 이유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 그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기 위해서,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낭군이 되기 위해서, 나는 지금껏 살아왔다. 모두가 따돌리며 피하던 내 곁에 가장 먼저 다가와 예쁘게 웃어주던 색동저고리 꼬마아가씨... 한없이 맑고도 따스한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대책없이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아이답지 않게 서늘한 쓸쓸함만 가득했던 나의 두 눈에 처음으로 따스한 기운이 파고들어온 거다. 죽는 날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그 따스함을 잊을 수는 없으리란 걸 나는 직감했다.

 

 

어의 유홍필의 말을 듣고 아버님이 토막촌에 불을 지르라 명하셨을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를 그녀는 혹시 나중에라도 알 수 있을까? 천한 서출 주제에 대감께 간언을 하면 자칫 경을 치게 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가 토막촌에 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역병이 돈다고 하여 대뜸 마을에 불을 놓으면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 것이니, 병자들이 회복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다고 나는 애써 아버님을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서릿발같은 불호령 속에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스스로 그 명을 집행하겠노라 청하는 것뿐이었다.

 

행여 나 아닌 다른 자의 지휘를 받은 군사가 토막촌으로 달려간다면, 그녀가 어디에 있든 상관하지 않고 마을에 통째로 불을 놓을지 모르기에, 그 와중에 몰락한 양반가의 여인 한 명쯤 불에 타 죽는다 한들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 몹쓸 짓을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그녀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명을 내려 불을 놓기 전에 그녀만을 따로이 구해냈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벌레보듯 하면서 하늘 앞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 하여 꾸짖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그녀는 아직도 모른다.

 

 

단 하나뿐이던 친구 영휘도 언젠가부터는 내게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나도 차라리 그처럼 몰락한 양반이라면 이 비뚤어진 세상을 뒤집어 놓겠다고 시원스레 반항이라도 해보련만, 세도의 중심에 선 아비를 두었기에 그럴 수도 없는 나는 오늘도 어중간한 그 어느 자리에선가 헤매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오직 그녀만 헤아려 준다면 나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들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련만, 알 턱없는 그녀의 원망스런 눈빛을 보면서도 변명 한 마디 못하고 돌아서던 내 가슴엔 핏물보다 진한 눈물이 흘렀음을...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녀도 알게 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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