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해피투게더' 천재 뮤지션 윤종신의 재발견 본문
요즘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가끔씩 그 자리에 출연하지도 않은 사람의 존재감이 엄청나게 부각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의 '무한도전' 특집에서는 박명수, 하하, 정형돈 세 사람만 출연했는데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유재석의 존재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었죠. 그런데 이번 주의 '해피투게더'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한 사람 '윤종신'의 존재가 너무 크게 드러나는 바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유재석과 '무한도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름이니 만큼 그럴 수 있다 쳐도 '해피투게더'와 윤종신은 별 상관도 없는데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너무 뜻밖이었으니까요.
'목욕탕 음악회 특집' 이라는 주제하에 4명의 실력파 가수들이 찜질복을 입고 모여 앉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자리에서 가장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 사람은 출연하지도 않은 윤종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발설한 사람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성시경이었죠. 성시경이 최근 박정현에게 먼저 듀엣을 제안하고, 김연우에게도 청하지 않은 노래 한 곡을 자발적으로 선사했다는 말이 나오자 성시경은 "그게 바로 윤종신씨한테서 배운 거거든요!" 하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작곡가 윤종신의 전략은 크게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고객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1990년대의 윤종신은 하늘이 내린 미성(美聲)을 자랑하는 최고의 발라드 가수였습니다. 015B의 객원 보컬로 데뷔했던 당시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텅 빈 거리에서'를 듣는 순간부터 저는 나름대로 그의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 한 명에게 열광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윤종신이라고 대답하곤 했었습니다. 1995년의 '환생'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런데 지금의 윤종신은 예능인으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졌습니다. 심지어 '라디오스타'에 출연했던 어느 게스트는 "윤종신씨가 음악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게 웃길까요?" 라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지요. 하지만 윤종신은 결코 뮤지션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는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이번 주의 '해피투게더'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하긴 윤종신이 새로 작곡한 노래를 후배 가수들에게 주고 싶어서 얼마나 물량공세(?)를 퍼붓는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할 당시 팀 동료였던 이효리가 "종신 오빠가 너무 노래를 많이 보내는 바람에 일일이 거절하기도 힘들어 죽겠다" 면서 농담 섞인 푸념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벌써 3년 전쯤의 일인데, 여전히 윤종신이라는 음악의 우물에서는 끊임없이 새 노래가 솟아나오는 모양입니다.
요즘도 수시로 성시경에게 "형이 노래 몇 곡 보냈거든. 확인해 봐!" 그래서 메일을 확인해 보면 무려 9곡의 노래가 들어와 있다는군요. 그것도 한 번에 9곡이고, 그와 같은 메일이 여러 번 왔다고 하니까 대체 몇 곡인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함께 출연한 김연우와 박정현도 예외 없이 윤종신으로부터 많은 노래를 받았다고 하니... 정말 놀랍습니다. 도대체 이제껏 윤종신은 몇 명에게 몇 곡의 노래를 보낸 걸까요?
무릇 창작의 고통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한 곡의 노래를 만드는데도 피땀을 흘리며 머리카락이 다 빠지게 되는 것이 평범한 사람의 경우라면, 윤종신은 타고난 천재임이 확실합니다. 무조건 다작(多作)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쉽게 수많은 곡을 지어내고 그 중에 출중한 명곡들이 심심찮게 탄생한다는 것은 절대 범상한 자질이 아니지요. 성시경이 기억하는 윤종신의 가장 놀라운 모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넌 감동이었어'의 후반부 가사를 "어, 잠깐만~" 하더니 정말 순식간에 마무리하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윤종신은 최근 '슈퍼스타K3'와 '나는 가수다'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우선 '슈스케'에서는 3년째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버스커버스커'의 독특한 편곡에 의해 거의 다른 곡으로 탈바꿈한 자신의 노래 '막걸리나'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과 겸허한 자세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십년간 프로 뮤지션으로 활동해 온 선배의 입장에서 볼 때, 까마득한 후배가 자신의 곡을 너무 많이 뜯어 고쳐 놓은 것은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었거든요. 하지만 윤종신은 오히려 후배들의 새로운 해석을 높이 평가하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음악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나가수'에서는 본인이 엄연한 가수의 신분이건만, 가수로서 초대받지 못하고 MC의 자격으로 초대받은 것이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역시 윤종신은 모든 거북함을 툭툭 털고 기꺼이 그 자리를 수락했습니다.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대중음악에 조예가 깊은 MC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노래하지 않는 가수, 언제나 동료들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청중들에게 정성껏 소개해 주는 가수 윤종신의 존재가 있어 '나가수'가 언제나 든든합니다.
성시경과 박정현, 김연우와 케이윌의 노래를 들은 후, 토크는 또 다시 윤종신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성시경이 운명처럼 히트곡 '거리에서'를 만난 일화 때문이었습니다. 타이틀곡을 정하지 못해 고민하던 중 윤종신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컴퓨터에는 '고객상담용 모니터'가 따로 있고 여러 개의 폴더 속에 수많은 노래들이 저장되어 있답니다. 윤종신이 하나씩 들려 주면서 "이건... 별로야? 그럼 다른 거!" (ㅎㅎㅎ) 그런 식으로 체크해 나가던 중에 성시경은 '거리에서'의 데모곡을 듣는 순간, 바로 이거다 라는 느낌이 왔다더군요.
이렇게 끝없이 후배 가수들의 입을 통해 윤종신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그의 존재감은 '해피투게더'가 촬영되는 좁은 목욕탕 안을 꽉 채웠습니다. 그 자리에 없어도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 와중에 케이윌은 홀로 윤종신과 친분이 없다면서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더니, 스스로 영상편지를 보내겠다고 나섰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종신이형, 저 돈 벌고 싶어요!" 이제 조만간 케이윌의 메일함도 윤종신이 보내는 신곡들로 가득 메워질 것이 불을 보듯 훤하군요..ㅎㅎ
모든 생활 속에서 음악의 영감을 섬세하게 찾아내는 윤종신은 오만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고, 유머러스한 천재였습니다. 비록 제가 사랑했던 1990년대 초반의 신비한 이미지는 사라졌지만,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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