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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추노' 12회를 시청하면서 문득 그 작가의 여성관이 궁금해졌습니다. 드라마의 전개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비호감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주인공 언년이의 캐릭터를 보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관계로 리뷰를 쓰면서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를 한동안 고민했으나, 제 느낌에는 혜원이보다 언년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듯하여 앞으로도 계속 언년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추노'에는 아찔할 정도로 멋진 남성 캐릭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대길, 송태하, 최장군은 말할 것도 없고, 악역인 황철웅과 귀여운 바람둥이 왕손이, 궁녀를 사랑했던 우직한 한섬이 등의 남자들이 제각각 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정..
인생이 뭐 재미있어 사나? 다들 내일이면 더 재미있을 줄 알고 사는 거지 '추노'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전에, 그의 인생관이라 할 수 있는 한 두 줄의 대사를 인용해 놓았는데, 저것이 바로 최장군의 캐릭터를 말해주는 대사입니다. 그는 이미 30대 후반의 나이로 대길보다도 한참 손윗사람이며, 원래 신분은 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무과시험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패가망신을 당하고, 목숨을 버리기 직전에 대길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군요. 과거에 낙방해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패가(敗家), 즉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은 금방 나오더군요. 최장군과의 첫 만남을 추억하던 대길의 회상씬에서 등장했던 대길의 대사가 바로 답이었..
'추노' 11회는 비교적 평이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섬뜩한 변화를 보이며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바로 이한위가 연기하고 있는 오포교입니다. 지금껏 오포교는 추노꾼인 대길네와 천지호네를 비롯하여 방화백, 마의 등 저잣거리의 하층민들과 비교적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큰 주모 작은 주모와도 스스럼없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포교는 벼슬아치인 동시에 거간꾼입니다. 한편으로는 공직자로서 나랏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양반들과 추노꾼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주고 구전을 떼는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더불어 도망친 노비 큰놈이를 찾고 있던 대길 도령에게 추노 천지호..
오라버니 울지 마소, 이 내 가슴 찢어지네 서늘하던 눈매에서 더운 눈물 넘치는데 이 내 손이 더러워서 닦아주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려니 이 내 속이 무너지네 보소, 대길 오라버니, 울지 말고 나랑 살자 오라버니 웃는다면 무엇이든 못할까봐 매일매일 노래하고 춤도 추고 해금 켜고 꽃이야기 달이야기 도란도란 들려줄게 오라버니 눈물은 우물물보다 정갈하지 한 계집을 십년이나 못 잊는 사내가 어디 있누? 오라버니 버리고 시집간 년 빨랑 잊고 곁에 있는 내 손 잡고 천년만년 같이 살자 당치않은 욕심인 거 너무너무 잘 알지만 아픈 상처 보듬으며 기대살면 아니될까? 정갈한 눈물에야 내 손댈 수 없지마는 피 흘리는 손마디야 잡아주지 못하겠소? 오라버니 원한다면 길쌈하고 빨래하고 밥도 짓고 애도 낳고 내 한평생 그리 살..
'추노'는 갈수록 재미있습니다. 이 스펙타클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어떻게 재미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물들의 감정선을 주로 따라가며 시청하는 저로서는 적잖이 난감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긴박한 상황 전개에만 몰입하다 보면 대충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게 되는데, 좀 더 깊이 몰입하려고 할 때는 여지없이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각각의 인물들이 당최 근본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마음인 것인지가 뚜렷이 잡히질 않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의문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대길 - 언년아, 정말 네가 시집을 갔단 말이냐! 대길이의 추노 인생은 큰놈이와 언년이 남매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큰놈이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집과 온 재산을 불태우고 언년이와 ..
'추노'라는 드라마의 장르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중하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정통 사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던 노비와 하층민들의 삶이 처참한 삶이 적나라하게 배경으로 깔리고, 꼭대기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던 소현세자는 추악한 정쟁(政爭)의 희생양이 되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소현세자를 따르던 충신들은 초개와 같이 죽어나가거나 가문이 몰살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부패한 권력의 핵심들은 여전히 썩은 내음을 풍깁니다. 이에 '노비당'이라는 이름으로 기습과 쿠테타를 전담하는 반란 세력이 가장 아래쪽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중이며, 소현세자가 남긴 마지막 혈손 이석견을 중심으로 몰락한 양반들의 세력도 집결의 움..
드라마 '추노'가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7회는 마치 공들여 만든 한 편의 영화와도 같더군요. 감칠맛 나는 대사와 적절히 어우러지는 가무(歌舞), 게다가 옛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도록 중간중간에 삽입된 고어(古語)들... 그 섬세한 구성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황홀함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송태하(오지호)는 스승이 살해당한 참혹한 현장에서 원수 황철웅(이종혁)과 맞서 싸우다가, 위기에 처한 혜원(이다해)이 부는 호각소리를 듣고 그녀를 구하러 달려갑니다. 소현세자의 유명을 받들고 한시바삐 원손을 구하러 가는 충신인 그가, 어찌 보면 참 한가하다 싶기도 하군요. 게다가 혜원을 잡으러 온 자들은 그녀의 오라버니가 파견한 집안의 호위무사 백호(데니안) 일행이니 실상 그..
서방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원해서 혼인하신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원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이 마음... 한 번도 당신께 전해 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말은 커녕 글로도 제대로 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 한 번도 이 집안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지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이 공간에서, 햇빛조차 받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 저의 운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태어날 때에는 성한 몸을 지녔었다는데, 가장 행복했을 그 시절을 저는 기억할 수가 없군요. 두 살 되던 해에 급작스런 열병을 앓고 나서 이렇게 되었다던데, 두 살난 어린아이였던 제가 무슨 큰 죄를..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한 명씩 뽑아 인물 탐구를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첫번째 주자는 웬만하면 주인공 대길이(장혁)로 선정하고 싶었으나, 6회까지 시청한 현재, 저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고 있는 캐릭터는 오히려 그의 반대편에 꿋꿋이 서 있는 송태하(오지호)입니다. 아마도 저의 타고난 성격과 생활 환경 때문일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정(正)과 반(反)이 존재하면 융통성 없게도 항상 정(正) 쪽으로 마음이 기울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나쁜 남자' 신드롬에 물들지 않고 있어요. 물론 나쁜 남자의 매력이 상당히 치명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제 눈에 더 밟히는 것은, 그 나쁜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착한 남자의 모습이었답..
아서라 왕손아, 그 손을 거두거라 활활타는 불나방처럼 달려들면 너 죽는다 헛귀로 듣지마라, 이 언니의 충언이다 뜰 안에 핀 꽃은 꺾는 법이 아니니라. 내 뜰 안에 핀 꽃을 내 손으로 꺾었다가 그 후로 십년동안 죽은 몸으로 살아가는 나의 꼴이 안 보이느냐, 정녕 이게 산 것이더냐 곱디고운 가시에 찔려 이내 몸은 시체구나. 칼을 맞고 총 맞아도 두려울게 있겠느냐 개똥밭에 구른다한들 아까울게 있겠느냐 오래전에 죽은 몸으로 버티며 살아감은 삼도하(三途河) 건너기 전에 꼭 한번만 보고지고.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비참한 이내 신세 왕손아, 내 아우야, 너는 보고도 모르더냐 아서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설화(雪花)는 뜨거우니 너의 손을 델 것이다. 눈속에 피어나니, 그 얼마나 뜨거우랴 눈속보다 더 추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