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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지던트' 백찬기와 이치수의 충성 대결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프레지던트

'프레지던트' 백찬기와 이치수의 충성 대결

빛무리~ 2011. 1. 2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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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통 정치드라마는 정치 이야기가 중심이 될 때라야 제맛이 납니다. 유민기(제이)와 장인영(왕지혜)의 러브모드가 진행될 당시에는 엄청 지루하고 오글거렸지요. 게다가 장인영의 생모 주일란(조은숙)이 등장하여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며 장일준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도 별로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현실 속에서 있을법한 이야기지만, 느닷없이 막장드라마적 요소가 첨가되니 '프레지던트'만이 갖고 있던 독특한 분위기가 죽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13회에서는 다시 본격적인 정치 싸움이 주된 테마로 등장하며 흥미진진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이 드라마에서 단연 최고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백찬기(김규철)였습니다.

김경모(홍요섭)의 참모인 백찬기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한 인물입니다.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김경모가 모르는 상태에서 행해집니다. 그런데 백찬기의 협박에 못이겨 기밀을 누설했던 윤성구(이두일)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장일준(최수종) 캠프에 합류함으로써 백찬기의 비열한 행각은 덜미를 잡히게 되었지요. 장일준의 선거본부장 이치수(강신일)는, 백찬기가 윤성구에게 돈을 입금했던 증거 자료를 들고 김경모 진영을 찾아와서 한바탕 퍼붓고 돌아갑니다. 비로소 그 일을 알게 된 김경모는 올곧은 원칙주의자답게 백찬기를 호되게 나무라는군요. "이건 범죄야. 내가 범죄를 저지르려고 대통령이 되려는 줄 아나?"


그런데 김경모에 맞서는 백찬기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명백한 죄를 저질렀고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굴복할 기미가 없이, 오히려 자기가 모시는 주군 김경모에게 언성을 높이며 뚜렷한 주관을 드러냅니다.

"후보님의 범죄가 아니라 저의 범죄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저만 내치시면 되는 거고요. 깨끗하고 고상한 정치는 이 세상엔 없습니다. 5년 전에는 이것보다 더했어요. 우리가 그냥 승리한 줄 아십니까? 후보님이나 대통령이 고고하게 폼잡고 있는 동안에, 밑바닥에서 일하는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이길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백찬기의 말을 들으면서 김경모의 얼굴은 점점 참담하게 질려 갑니다. 스스로 깨끗한 정치를 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자기는 꼭대기에 앉아서 눈뜬장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절규에 가까운 백찬기의 외침은 계속됩니다.

"저라고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나쁜 놈인 줄 아십니까? 아니요. 후보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나쁜 인간이 된 겁니다. 그런게 싫으시면 대통령 하지 마세요. 저를 감옥에 처넣으시고 후보 사퇴하면 될 게 아닙니까!" 음... 왠지 가슴이 아립니다. 김경모가 나직히 한숨쉬듯 말하는군요. "결국 정치가 이런 거란 말인가?" 그에 대한 백찬기의 대답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 할만큼 멋진 대사였습니다.


"네. 연꽃은 흙탕물에서 피지요. 후보님은 꽃을 피우십시오. 그게 후보님의 일이고, 흙탕물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제 일입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제 목을 치세요. 그런 게 정치입니다." 비열한 놈, 나쁜 놈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순간의 백찬기는 누구보다 멋졌습니다. 누구라도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스스로 나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주군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그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더군요.

글쎄, 결국은 자기 욕심일까요? 김경모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당연히 자기도 그 후광을 입을 테니까, 예전부터 호시탐탐 노려 온 국무총리 자리를 꼭 차지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선거운동 중에 자기가 저지른 비리가 외부에 탄로나서 일시적으로 내처진다 해도 김경모와의 끈끈한 관계만 유지된다면, 나중에 김경모가 대권을 잡았을 때 다시 그의 측근으로 복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니까요.

어쩌면 "나 때문에 당신에게 흙탕물이 튀길 상황이 되면, 당신은 나의 목을 치고 깨끗함을 유지하십시오" 라는 이 멋있는 이 말조차도 김경모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기에게 붙잡아 두려는 수작에 불과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꼭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김경모를 향한 백찬기의 충성심만은 진짜라고 인정해 주고 싶었어요.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 충청도 지역의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미 3년 전에 퇴임하고 귀농했지만 그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꽉 잡고 있는 원로 정치인, 청암 송학수의 지지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장일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송학수와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30년 전, 장일준의 형 장일도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24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해 간첩은 즉시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법무부장관 송학수였습니다.

수십년간 그 일이 가슴에 맺혀 있던 장일준은 3년 전, 검찰총장 신희주(김정난)에 의해 송학수의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의 즉각적 퇴임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송학수는 50년 정치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쳤습니다. 이만하면 두 사람은 원수나 다름없다고 봐야겠지요. 청암 송학수가 장일준을 지지해 줄 확률은 제로였습니다.

장일준은 청암을 찾아가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빚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젊은이의 목숨을 꺾은 것에 대해 사과를 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회한 정치인은 단호하게 발을 뺍니다. 간첩 여부를 밝혀내는 것은 수사기관의 일이니, 장일도가 누명을 쓴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던 두 사람의 1차 대결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죽은 장일도의 친구였던 이치수는 다시 혼자서 청암을 방문하여 간곡하게 도와달라 청합니다. "그 사람의 죽음이 선생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군사정권이 문제였지, 선생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선생님도 마음이 편치는 않으셨을 게 아닙니까? 오랫동안 쌓인 앙금들, 이제 그만 푸시지요. 장후보는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청암은 무심한 얼굴로 동문서답 비슷한 말을 합니다. "농장에 갔더니 구제역 때문에 새끼 밴 소에게 수의사가 주사를 놓았는데, 죽어가는 순간에 새끼를 낳더군. 그런데 그 새끼까지 살처분해야 했네. 지옥도가 따로 없어. 내 머릿속엔 지금 그 생각밖에 없네. 그러니 정치 이야기는 그만 하게. 나는 누구도 지지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너무 단호해서 설득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나저나 아무리 짐승이지만, 죽어가면서 낳은 생명을 태어나자마자 살처분해야 했다니,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이치수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다시 찾아와 송학수의 집 마당에 무릎을 꿇고 기다립니다. 그대로 지나쳐 가려는 송학수를 향해 피를 토하듯 건네는 이치수의 말이 애절하게 가슴을 치더군요. "선생님, 간청합니다.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장일도는 저와도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제 목숨 나눠주고 싶을 만큼 아끼는 친구였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의 죽음이 그리도 안타까운 분이, 꽃다운 청년의 죽음은 단 한 번도 가슴아프지 않았습니까?"

늙은 송학수의 포커페이스가 약간 흔들리는 듯도 했지만, 결국 외면하고 나가 버리는군요. 그러나 이치수는 아무도 없는 그 마당에 꿇어 앉은 채, 찬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이고 기다렸습니다. 그런 이치수의 모습 역시 2인자의 감동적인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장일준에 대한 이치수의 마음은 주군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죽은 친구에 대한 우정이기도 하겠지요.


놀랍게도 장일준은 꿈쩍도 안할 것 같던 송학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방식은 고상렬(변희봉)을 끌어들일 때와 대동소이하더군요. 모진 세월 속에 굳어지고 더럽혀졌을 망정, 그 깊은 내면에 아직도 남아 있는 여린 인간성을 공격(?)한 것입니다. 고상렬에게는 젊은 시절의 순수했던 열정을 되새기게 하더니, 송학수에게는 오랫동안 지녀 왔을 죄책감을 격발시켰습니다.

"형님께서 말씀하셨죠. 분노는 세상을 부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청암이 물었습니다. "현명한 젊은이였군. 그렇다면 무엇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장일준이 말을 이어갑니다. "연민입니다. 상대를 불쌍하게 보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50년 정치 인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사람은 굶어 죽어가는데 민주주의를 말할 처지가 못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애꿎은 목숨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겠지요. 저 자신도 그랬으니까요.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을 이제는 용서하렵니다. 아직도 증오하지만 용서합니다. 과거와 화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용서하지 못하면 저는 이 땅에 존재하는 구시대와 결코 양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또 반쪽짜리 대통령이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는 제가 바라는 나라, 형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죽은 형의 목숨값을 내놓으라며 서슬 퍼렇게 들이대던 장일준이 단 며칠만에 저렇게 온화한 얼굴로 바뀌어, 그 시대의 정치인으로서 살아가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자기 마음을 이해해 주니, 철벽같던 송학수의 마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아닌 척 해도 가슴 한구석에는 무고한 청년의 죽음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을 테니까요.


용서한다는 말은 비록 단순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장일준은 과연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송학수가 장일준을 만나고 돌아올 때까지 그의 집 마당에 꿇어앉아 기다리던 이치수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청암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송학수를 끌어들인 장일준의 수완도 눈부셨지만, '프레지던트' 13회에서 가장 빛났던 인물은 백찬기와 이치수였습니다. 더 이상 절대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자기를 그토록 희생하면서까지 1인자를 보필하려는 2인자의 충성심이란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주군에게 자발적으로 바치는 2인자들의 충성 대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물겹더군요.

"흙탕물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저의 일이니, 주군께서는 그 위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십시오." 그저 비열한 악역으로만 생각했던 백찬기의 처절한 눈빛이 좀처럼 잊혀지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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