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신데렐라 언니' 제자리를 찾아가는 은조와 효선 본문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기' 라는 시도는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본다는 그 발상은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역사 속의 실존인물들도 그 새로운 시각에 따라 재조명된 인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심지어 충신과 간신이 뒤바뀌고, 성녀와 악녀가 엇갈리는 사태에 이르러 자칫하면 가치관이 뒤집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각이란 "우리가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악인이 아니었다" 는 인식의 전환일 뿐, 결코 "악인이 좋은 것이다" 라는 가치관의 전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착하고 올바른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드라마 속 캐릭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로 악인이어서는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가 없어요. 매력을 어필하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악하게 보일 뿐 속으로는 절대 악하지 않은, 선량한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매력적인 악역'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악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뿐, 사실은 선역이에요. 이제껏 악역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던 모든 드라마에서 그러했습니다. 진짜 악인이 주인공이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요.
지금 제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은 유명한 영화 '레옹' 입니다. 레옹은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유능한 킬러인 그의 손에 죽어간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악역이어야 마땅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신 분 중, 레옹을 악역이라고 생각한 분이 계신가요? 오히려 레옹은 가족을 잃고 쫓기는 가엾은 소녀 마틸다를 보살펴주다가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눈물겨운 선역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인식의 전환'에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외면적으로만 보면 악인이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진짜 악인은 아니라는 사실'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언밸런스한 내면과 외면이 동시에 비쳐질 경우, 바라보는 사람들은 외면보다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겉에서 볼 때는 검은색인데 내면을 들여다 볼수록 흰색이 드러나는... 그 흑백의 대비 효과는 겉과 속이 똑같은 단선적 인물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내포하고 있지요. 따라서 이러한 캐릭터는 가장 강렬한 흡입력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레옹'과 같은 수작(秀作)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내 사랑 팥쥐'가 또 생각나는군요. 대략 2002년쯤에 방송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역시 이 작품도 콩쥐와 팥쥐에 대한 인식을 뒤집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요 인물인 콩쥐와 팥쥐의 캐릭터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나름 획기적(?)이었던 그 시도는 거의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팥쥐 장나라는 어려서부터 너무 솔직한 성격탓에 사고뭉치 밉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사실은 순수하고 착한 아가씨였으며, 콩쥐 홍은희는 상냥하고 얌전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사실은 내숭과 욕심으로 똘똘 뭉친 나쁜 아가씨였습니다. 첫 회부터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시작했으니, 시청자들은 처음부터 팥쥐를 선역으로, 콩쥐를 가증스런 악역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지요. 겉과 속이 언밸런스해야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냥 단선적인 캐릭터가 되어 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에 방송되는 '신데렐라 언니'는 한층 진화된 캐릭터들을 보여줍니다. 3회말까지도 언뜻 보기에 송은조(문근영)는 글쎄 뭐 나쁜 아이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착한 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차갑고 시니컬한 태도를 잘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구효선(서우)도 적잖은 짜증을 유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순수하고 악의 없는, 착한 아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훤하게 속을 드러내보이지 않았기에, 어차피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를 다 알면서도 그녀들의 변화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4회를 보니, 결국 어쩔 수 없더군요. 은조와 효선은 자기의 갈 길을 찾아서 가고 있었습니다. 홍기훈(천정명)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은조는, 제법 남이 하는 말에 순순히 대답할 줄도 알게 되고, 심지어는 아버지 앞에서 '사이 좋은 척'을 하자는 효선의 요구까지도 "알았어. 그렇게 할게"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지요. 한없이 까칠하고 차갑던 그녀가 그렇게 순하고 부드러운 내면을 드러내면서 이제 송은조는 명실상부한 호감형 선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8년이 흐른 후에는 의붓아버지 구대성의 회사(대성 참도가)에 들어가 대충 팀장 정도의 위치에 오른 듯 싶더군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거래처 인물들과 능수능란하게 사업적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은둔형 외톨이 같던 예전의 그 소녀가 맞나 싶었습니다. 가정 내에서 늘 겉돌며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던 삐딱한 송은조는 이제 없습니다. 그녀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가업(家業)에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부친에게 큰 힘을 실어주고 있네요. 어딜 봐서도 송은조에게 악역의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에 반해 선역으로 출발했던 구효선은 완벽한 악역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자기 내면의 악감정을 깨닫고, 송은조를 향해 거침없이 발톱을 드러낸 이유부터가 참으로 유치했기에, 구효선의 캐릭터는 헤어나올 수 없는 밉상으로 전락하고 말았군요. 시발점은 자기가 짝사랑하던 동수가 은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은조가 유혹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동수가 자기 마음대로 그런 것인데, 효선은 은조에게 미움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기훈이 은조에게 만년필을 선물한 것도 어디까지나 기훈의 마음이었을 뿐인데, 그 이유로 효선은 또 은조를 미워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은조는 효선에게서 별로 빼앗은 것이 없습니다. 같은 집에서 살고, 효선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공부를 한다는 것 외에는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그 큰 집에, 그 많은 돈에, 뭐 그 정도를 갖고 효선에게서 뭔가를 빼앗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은조에게는 단 하나 가진 것이었던 엄마를 효선이가 절반 이상이나 빼앗아가 버린 셈입니다. 구대성(김갑수)이 세상을 떠난다면 모를까, 살아있는 그의 집에 같이 사는 한 송강숙(이미숙)으로서는 은조보다 효선에게 더 마음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것 외에, 사실 은조는 효선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효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을 모조리 은조에게 돌리는 치사함과 이기심을 드러냅니다.
진정한 여자 악역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은 바로 '내숭'이지요. 구효선은 그 방면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선보입니다. 1회에서도 나오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우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고 진작에 알아차렸지만, 이제는 아예 대놓고 내숭질입니다. 방에서 은조와 싸우다가 갑자기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를 발견하는 순간... "언니, 사랑해" 라고 말하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효선은 느닷없이 군대에 가게 된 홍기훈이 은조에게 전해달라고 맡긴 편지를 전해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았고, 8년 후에는 아직도 기훈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은조에게 자기가 기훈을 만나고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상처를 줍니다. 은조에게서 엄마도 빼앗고, 하나뿐인 사랑도 빼앗으며, 이렇게 구효선은 착실히 악역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해피투게더' 이번 주 방송을 보니, 서우는 이미 자기가 비호감 캐릭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수많은 안티팬을 갖게 될 것임도 예상했던 듯 싶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제 서로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았으니, '신데렐라 언니'의 앞날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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