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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언년이의 편지 - 대길에게 [추노 편지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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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지금 계신 곳은 제가 있는 이곳보다 더 춥겠지요? 냉기 가득한 그 곳에서 저를 미워하고 계신가요? 그 어떤 모진 말로 저를 탓하시더라도, 당신의 목소리를 한 번만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언년이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정하신 좋은 혼처도 마다하시고,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저에게 다가와 붉은 꽃신을 신겨 주시며 하시던 말씀이... "나는 평생 살거다. 너랑 같이" ...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한데, 어느덧 무심한 세월은 10년을 넘겼습니다. 뜨거운 입술의 감촉도 생생한데, 이제 도련님의 시신은 흔적조차 없겠군요.
제 오라비가 불을 놓아 집을 태우고 사람들을 죽일 때, 오라비는 저를 살리려 한다 하였지만 사실은 저를 죽인 것이었습니다. 도련님이 그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이 누이 또한 더는 산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오라비는 정녕 몰랐던 게지요. 정신이 혼미한 채 오라비의 손에 이끌려 허위허위 도망치느라 도련님의 마지막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하였으니, 언년이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차가운 땅 속에 묻히실 제, 불타버린 옷가지 대신 고운 흰 옷 한 벌이라도 챙겨드리는 사람이 있었던가요? 후사도 없이, 도련님의 온 가족이 그 불길 속에 돌아가셨으니, 기일마다 허기조차 달랠 수 없어 더 춥지는 않으셨던가요?
도련님이 그렇게 추위에 떨고 계시는 동안, 이 천한 언년이는 억지로 아씨가 되었습니다. 도련님의 집안을 밟고 일어선 제 오라비는 호위무사와 가신(家臣)들까지 두고 저를 아씨로 섬기라 하였습니다. 오라비는 저를 탐하는 양반 최사과의 후처로 들어앉아 생을 편안히 보내라 하였으나, 내세에 다시 도련님을 뵈오면 그 앞에 석고대죄할 이 몸을 어찌 그자의 손에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명안 스님의 암자를 찾아오는 길조차 홀로 도망친 제게는 너무도 멀고 험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호만을 믿고 걸음을 재촉하던 길에 하마터면 능욕을 당할 뻔하였으나, 다행히도 상처입은 구원자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으니 하늘도 끝내 무심하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내세에 도련님을 다시 뵈올 수 있도록... 이처럼 새하얀 소복을 입고, 당신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빌 수 있도록... 하늘이 배려해 주셨나 봅니다.
매년마다 돌아오는 도련님의 기일을 당부하며, 과일이랑 떡이랑 더불어 너무 홀하지 않은 젯상을 당부하며, 스님께 드릴 것이 고작 한줌의 머리칼 뿐이었으니, 언년이는 오늘도 당신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먼 옛날에도 지금도, 제가 도련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초라한 마음 외에 아무것도 없군요.
속세를 떠나고 싶어도 매인 몸이라 저를 쫓는 자들이 이토록 많으니, 오라비에게 잡히거나 최사과 양반에게 잡히거나, 이 몸 하나 지킬 힘이 없는 저는 어찌 해야 할까요? 절명의 순간에 저를 구해주셨던 저분을 따라가도 될까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만, 담백한 눈빛을 지니신 저분께 잠시 의탁해도 될까요?
산길을 지나 물을 건너, 언년이는 도망을 칩니다. 이 험한 길 끝에 도련님이 계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떠나갑니다. 반가이 맞아 주시지 않아도, 모진 말로 내치셔도, 이 길 끝에서 저를 기다리실 도련님이 계시기에... 다시 뵈올 그 날까지 곱게 기다리려고, 언년이는 오늘도 하염없이 먼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 관련글 : '추노' 송태하의 편지 - 소현세자에게 [추노 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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