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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스페셜' 진심으로 마지막 감동을 전하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선덕여왕 스페셜' 진심으로 마지막 감동을 전하다

빛무리~ 2009. 12. 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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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특집을 가장한 하이라이트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그냥 틀어만 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꾸준히 못 보고 띄엄띄엄 보신 분들로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방송도 환영하실 법 하지만, 저는 일단 정해놓고 보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는 편이므로, 하이라이트는 거의 보나마나거든요.


역시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중간에 제작진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좀 길게 들어갔고, 그들이 원래 만들려고 했던 드라마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참고삼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일종의 수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원래 모든 예술이란, 예술가의 손을 떠나게 되는 순간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거든요. 드라마 '선덕여왕' 역시, 원래 제작진의 의도와는 상당히 달라진 모양새로 그들의 손을 빠져나와 각각의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미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아,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의 참고만 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대충 흘려가면서 스페셜 방송을 보다가 말다가 하는 와중에, 무심히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제 귀에 덕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승만에게 왕위를 넘기거라."

"앗!" 하면서 저는 급히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분명히 없었던 내용이라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의 선덕여왕 덕만이, 평생토록 아끼며 후계자로 키워 왔던 조카 춘추를 앞에 두고 마지막 유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막에는 '미방송 장면' 이라고 찍혀나오더군요.


"골품제도를 네가 없애야 할 필요는 없다. 네가 손대지 않아도, 결국 골품제도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너는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룰 군주로서, 그런 정치적 소용돌이에 굳이 휘말리지 말거라. 그 짐을 승만에게 넘기고, 너는 후일을 준비하거라."

"황명... 이십니까?"

"이 시대의 왕이, 다음 시대의 왕께 드리는... 충언이다."

흰 옷과, 그 빛깔 만큼이나 창백한 얼굴의 여왕이 곧 스러질 듯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여전히 야심찬 눈빛을 이글거리던 조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절하며 순명하였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낀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권력 투쟁만이 난무하던 왕실이었지만, 죽음을 앞두고 혈육간에 오가는 진심... 그것만은 야심가 춘추로서도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복야회의 반란에 휘말린 김유신 관련 에피소드에서 '진심'이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 저는 도대체 그 '진심'이라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 중에서 지금도 가장 공감되지 않고 제 마음 속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동동 떠 있는 캐릭터가 김유신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스페셜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미방송분, 거기서 짧게 스쳐지나간 덕만의 진심은 그대로 제 마음에 깊이 와서 박혔습니다.

덕만에게 있어 춘추의 존재는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애당초 왕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그녀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조차, 언니인 천명공주의 죽음 때문이었지요. 단지 언니를 죽인 미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면, 그거야 너무 초라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자기 때문에, 자기를 대신해서 언니가 죽었으니, 그녀가 남긴 한 점 혈육을 위해서 스스로 어머니 역할을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4대 임금 세종을 향해 "과거의 모든 죄업은 다 내가 짊어지고 갈 터이니, 임금께서는 오직 좋은 것만 물려받아 태평성대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선덕여왕도 춘추를 위해 온갖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들은 모두 자기가 처리해주고 떠나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야속하게도 명이 짧아 그의 앞길을 다 치워주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으니, 아끼는 춘추가 올가미에 휩싸이지 않도록, 그 동안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사촌동생 승만공주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 나머지 장애물을 짊어지도록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단순하게,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되는지, 정황상 논리적으로 어느 부분에 구멍이 있는지, 성골과 진골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런 것들이 제게는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극을 보는 시각 자체가, 일반 드라마를 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사극은 그저 역사적 사실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모티브를 차용하여 만들어낸 픽션일 뿐, 결코 역사와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역사적 사실과의 싱크로율이 낮다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만,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 친구들이 행여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언제나 방송 시작 전에 "이 드라마의 대부분 내용은 허구로 만들어진 것이며, 역사적 사실과는 다릅니다." 라는 자막을 넣어 주면 더 확실하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요즘은 아이들도 너무 영리해서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며, 사극과 역사적 사실과의 싱크로율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시는 분들의 시각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약간 옆길로 새었는데, 다시 돌아와서, 저는 조카를 대하는 선덕여왕의 진심에 생각지도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철없는 춘추는 이모 덕만을 정적(政敵)으로 여기고 경계하거나 적대시하는 태도를 수시로 보였으나, 덕만은 한 번도 춘추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춘추가 똑똑하게 굴수록 그녀는 더욱 기뻐하였고, 하룻강아지처럼 미실에게 겁없이 대들다가 눈물을 흘리며 나가떨어질 뻔한 춘추를 감싸안아 일으켜 준 것도 그녀였습니다. "춘추가 있기에, 우리는 둘로 나눌 수 있다" 고 말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실이 장악하고 있던 황궁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든 것도 그녀였고,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춘추에게 힘이 되어 달라" 고 평생의 지기인 김유신에게 당부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반말로 표현되었으나, 왠지 선덕여왕이 김춘추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 제 귀에는 극존칭으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이 시대의 왕이, 다음 시대의 왕께 간곡히 청하오니... 부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멀리 앞날을 보시옵소서.
 떠나기 전에, 이 손으로 그대의 앞길을 굳건히 다져 주려 하였으나,
 이미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험한 세상에 홀로 남을 그대가 염려될 뿐입니다.
 그대는 더욱 큰 일을 할 사람이니,
 눈앞에 놓인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한 걸음만 쉬었다 가시옵소서."

역사와 관계없이 극의 전개로만 미루어 볼 때, 승만의 존재는 그야말로 허수아비 왕이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권력의 실세는 모두 춘추에게로 넘어가 있으며, 단지 손을 더럽히거나 많은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런 것들을 말끔히 청소하기 위해 승만을 이용하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언뜻 제 머릿속에는 영국 왕실의 비극적 귀공녀 '제인 그레이'가 떠오르더군요. 겨우 17세의 나이에,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쟁에 휘말려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9일만에 폐위되고 억울하게 사형까지 당한 여인이었지요.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진덕여왕(승만공주)은 7년의 재위기간 동안 당나라와의 외교를 튼튼히 하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임금이었으니, 결코 제인 그레이와 같은 허수아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극중에서는 제인 그레이와 같은 힘없는 희생양으로 그려진 셈입니다.


이렇게, 선덕여왕의 한없는 희생과 배려를 딛고 일어선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훗날 백제를 멸망시켜 삼한일통의 첫발을 내딛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최종회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춘추가 어떻게 되었을지를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는데, 어제의 스페셜에서 미방송분을 보게 됨으로써 궁금증도 풀리고 마지막 감동도 느낄 수가 있었을 듯 합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좋게 보아주고 싶군요. 그만큼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드라마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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