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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 봉군씨와 애자씨를 보며... 본문

드라마를 보다

'맨땅에 헤딩', 봉군씨와 애자씨를 보며...

빛무리~ 2009. 9. 2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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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이하 맨딩) 그 황당스런 기억상실증 에피소드가 살짝 머리를 들이밀던 4회말에 벌써 질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관성처럼 '맨딩'을 시청했다. 더없이 식상하고, 무지하게 황당하고, 스토리를 산으로 가게 만들 것이 뻔한 그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가는지가 의외로 약간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윤여정씨의 출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채널을 고정하게 된 면도 있었다.


글쎄, 스토리 자체는 역시 예상대로 산으로 가고 있었기에 별로 높이 평가해 줄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대체 왜 기억상실증이라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주인공이 정신요양소에 수감되는 상황이 발생해야만 했는지 그 필연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스토리 진행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생뚱맞게 동동 떠다니는 그 기억상실증 에피소드를 통해서 나는 또 다른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많은 기억들에 시달리며 살아가는가... 그 기억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기억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친구와 대화하면서도 "1998년 9월 말에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네가 이렇게 말했었잖아." 이런 식이다. 10년 넘게 지난 사소한 일이라도 날짜를 비롯하여 그때 나눴던 대화의 토씨 하나 까지도 기억해내려고만 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 친구들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며 "그랬니?" 라고 할 뿐이다..;;

기억력은 이렇게 좋은데다가 성격은 쿨하기보다는 차라리 소심하고 꽁한 편에 가깝다. 이래갖고서야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남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절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데, 한 번 심하게 상처받은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날 지경이다.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쿨하고 시원스런 성격이 되어보려고 왜 노력을 안했겠는가? 그러나 소심하고 약한 천성을 강하게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나날이 상처는 늘어만 갔고, 게다가 이 된장스런 기억력은 그 모든 크고 작은 상처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차곡차곡 켜켜이 쌓아 두었다. 나는 스스로 내 기억들에 짓눌려 살아간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때로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차봉군(정윤호)의 모습은 굉장히 편안해 보였다.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웃는 저 얼굴을 보며 나는 왠지 부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지, 다 잊어버렸으니까 너는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하겠니...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장승우와 마주치고, 저렇게 나쁜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고통은 다시 시작된다. 물론 자기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황도 마음 편하지는 않았겠지만, 끔찍한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

그리고, 드라마에 나오는 차봉군의 모습에서는 '기억상실증'으로 인한 또 하나의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회적인 규범과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라고나 할까? 할머니 뻘의 애자씨(윤여정)와 스스럼없이 만나자마자 말을 트고 또래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너무 예뻐 보였던 건, 나만 그랬을까?


아주 단순하게,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위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나, 정작 그 당위성은 어떤 절대자가 우리에게 지시해준 것들이었나?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과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이 보여주는 투 샷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나는 순간 70대 중반의 나이에 30대 남자와 결혼했다던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일화를 떠올렸다.
솔직히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작가 뒤라스이니만큼 재산이 만만치 않았을테고, 젊은 남자가 그녀와 결혼했을 때야 그 재산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제 '애자씨와 봉군씨'의 모습을 보면서,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매우 존경하는 지인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부는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야.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게 중요치 않게 돼. 그냥 너무 편안하고 좋은 친구일 뿐이야."


물론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 있겠지만, 그 말씀이 결코 틀리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어서 마음이 평화롭고 즐거울 수만 있다면, 사회적 규범이나 남들의 시선이 뭐 중요할까?
봉군이가 모든 아픈 기억을 잊은 채로 저렇게 애자씨와 손 잡고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긴 했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아련했다.

애자씨와의 평화롭던 꿈들을 뒤로 하고, 이제 기억을 되찾은 차봉군은 다시 험악한 세상으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애자씨의 역할은 더 남아 있을 것이다. 전재산을 물려준다든가 뭐 그런 식의 식상함을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봉군이에게 그녀의 그림자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휴식을 그에게 선물해 준 사람이 애자씨였으니까, 그렇게라도 저 둘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내게는 드라마의 전개와 상관없이 혼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보았던 '맨땅에 헤딩' 5~6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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