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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특별출연 정유미가 미친 존재감 과시한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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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특별출연 정유미가 미친 존재감 과시한 이유

빛무리~ 2015. 12.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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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의 생각과 느낌은 점차 변해간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오직 분명한 것은 변했다는 사실뿐이다. 엄홍길 산악대장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가 2007년이었으니 대략 8년 전이다. 방송에서, 그것도 오락 프로그램에서 처음 접하는 산악인의 모습 자체가 매우 신선했고, 살면서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었던 고산등반가들의 생생한 경험담 또한 그 치열함 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그 곳을 번번이 스스로 찾아나서는 그들의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한 후 내 마음속에 드는 느낌은 8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눈 덮인 에베레스트에서 35년의 불꽃같은 생을 마감한 박무택(정우), 조난 신호를 받고 죽음의 길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홀로 구조에 나섰다가 역시 돌아오지 못한 박정복(김인권), 아끼는 후배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 원정대를 꾸려 목숨 건 산행을 떠났던 엄홍길(황정민), 그들의 모습에서 뜨거운 인간미와 감동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강도가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 남는 것은 박무택의 장례식장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 있던 최수영(정유미)의 모습이었다.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강호동이 엄홍길에게 물었다. "만약 따님께서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왔는데, 대장님처럼 고산등반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엄홍길은 순간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음..." 하고 머뭇거릴 뿐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에 후회가 없고, 동료들과의 우정도 끈끈하고, 산악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가득하지만, 오직 딸의 남편으로는 쉽게 허락할 수 없는 마음속의 갈등과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산악인들의 치열한 무모함보다 오히려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의 애타는 마음에 더욱 공감하는 순간, 엄홍길의 그 표정이 떠오르며 나 자신이 변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정우가 연기한 박무택 대원은 실존인물로서 엄홍길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4좌를 등정했던 산악인이다. 그는 2004년 5월 18일 계명대학교 원정대 등반대장으로 후배 장민 대원과 함께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8848m) 정상에 올랐으나, 하산 중 1시간만에 설맹으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설맹이란 설안염(雪眼炎)이라고도 하며 스키를 탈 때나 고산지역에 오를 때 눈(雪)에 반사된 자외선 과잉에 의해 각막이나 망막이 손상되어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현상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일시적 현상으로 예후가 좋은 편이나, 에베레스트 8750m 지점에서는 죽음을 재촉하는 불청객이었다. 함께 있던 장민(영화에서는 '정재현'이라는 가명으로 등장) 대원도 탈진으로 하산이 어렵게 되었다. 


한편 박무택의 선배인 백준호 부대장(영화에서는 '박정복'이라는 가명으로 등장, 김인권이 연기함)은 다음날 정상 등정을 위해 C3 (8300m)에 올라와 있었는데, 조난을 알리는 박무택의 무전을 받고는 오후 8시경 홀로 구조를 떠났다. 밤새 목숨 건 산행 끝에 오전 6시경 쓰러져 있던 박무택을 만난 백준호는 같이 하산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그 자신 역시 해발 8450m 지점에서 사망하고 만다. 평소 "죽더라도 히말라야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던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동료를 구하기 위해 기끼이 혼자 산을 올랐고, 다음 해에는 산악인 최초의 의사자(義死者)로 선정되었다. 


10개월 뒤인 2005년 3월 14일, 엄홍길은 박무택, 장민, 백준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를 꾸려 떠났다. 기상악화 등의 문제로 일정이 계속 지연되었기 때문에, 휴먼원정대는 히말라야에 온지 77일째인 5월 29일에야 에베레스트의 8750m 지점 절벽에서 로프에 매달린채 꽁꽁 얼어 숨을 거둔 박무택을 발견했다. 그러나 장민과 백준호의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으며, 박무택의 시신 근처에 떨어져 있던 백준호의 배낭을 발견했을 뿐이다. 원래 계획은 박무택의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이동하여 근처의 티베트 사원에서 제사를 지낸 뒤 화장하여 유골을 수습할 예정이었으나, 악화된 날씨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엄홍길과 휴먼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세컨드스텝(8700m) 바로 위에 돌과 바위로 무덤을 만들고 박무택을 안치했는데, 그 돌무덤에는 박무택의 아내가 쓴 편지도 함께 묻혔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아내(정유미)가 직접 베이스캠프까지 달려와 남편의 시신을 기다리며 엄홍길 대장과 무전을 하는 장면도 포함되었지만, 실제로는 어린 아들 때문에 따라가지 못했다. 나중에 '히말라야' 영화 촬영장에 온 적이 있었는데, 남편의 모습을 연기하는 정우를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영화 감상 후 포스팅을 위해 추가 자료를 찾던 중, 박무택의 아내가 쓴 편지 내용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절절함에 가슴 아파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다. 


찬민 아빠! 당신이 떠난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문기둥에 그려놓은 찬민이 키 높이가 한 뼘이 커지도록 당신은 오시질 않는군요. 그 곳에서 지켜보고 계시겠죠. 우리 민이가 얼마나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라고 있는지, 처음엔 당신이 언제 오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묻고 묻고 하더니, 이제는 그 마음에도 아빠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나 봅니다. 당신이 떠나던 날 아빠 가지 말라고 그렇게 울던 찬민이가 이제는 제 눈물 닦아주고 위로해주는 든든한 아들이 됐답니다. 

이곳엔 벌써 봄이 오려 합니다. 당신과 한 번도 같이 해보지 못한 그 봄이 또 오고 있습니다. 이맘때만 되면 짐을 꾸려 떠나던 당신 모습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제가 그렇게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던 당신이 미울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같이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왜 혼자 가버렸냐고 원망도 해봅니다. 당신의 그늘이 그렇게 크고 넓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찬민이랑 살아갈 날들이 두렵고 겁이 납니다. 보고 싶은 사람, 불러보고 싶은 이름, 이제는 가슴속에 묻어야 되는 당신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하나 이젠 잊은 척 살아가겠습니다. 찬민 아빠! 잘 가세요. 그 곳에서 우리 민이 꼭 지켜봐 주세요.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낸 당신께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라고...  (편지 출처 : http://blog.naver.com/lifeschool7/220570016978) 



박무택의 아내 최수영 역을 맡은 정유미는 특별출연으로서 분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등장에도 미친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연기력으로 산악인 가족의 애끓는 심정에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감상한 후 한동안 내 머릿속은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로 어지러웠다. 고산 등반이 결코 가치없는 일은 아니지만, 가족을 생각한다면 심히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꼭 그렇게 산에 가야만 하겠다면, 차라리 가족을 이루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잠시 후 생각의 방향을 달리 하니, 명확하지는 않아도 어렴풋한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을 어찌 단순하고 짧은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릇 누군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면, 그 업적의 그늘에는 가족(또는 친구나 지인)들의 희생이 있게 마련이다. 특별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룬 업적의 경우에는 당연히 가족의 희생도 더욱 커진다. 이는 단지 고산 등반뿐 아니라 모든 일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비록 그늘에 가려졌을 지언정, 가족의 희생은 업적 그 자체보다 더욱 위대하다. 세상 모든 일들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히말라야'는 마땅히 그 가족에게 바쳐지는 영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남겨진 명예와 관객들의 박수까지도 모두 가족의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박무택 대원을 비롯하여 고산 등반의 험난한 업적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은 산악인들과 그 가족들의 숭고한 희생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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