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임재범을 사랑한 세상, 독수리를 새장에 가두다 본문
'바람에 실려' 마지막회는 저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고민을 안겨 주었습니다. 미국 촬영 중 발생했던 임재범의 잠적에 관한 소식을 저도 물론 들었지만 거의 믿지 않고 있었거든요. 전혀 근거없는 뜬소문이란 느낌은 아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팬심의 발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잠적은 한 번이 아니라 무려 세 번에 걸쳐 발생했고, 임재범 본인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며 후회하고 있음을 밝히는 방송을 보게 되니, 제 머릿속에는 혼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약속'을 매우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상의 덕목은 '믿음'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에, 저는 그런 사람을 무척 싫어합니다. 물론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변경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거나 미룬다는 것은, 더우기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런다는 것은, 더구나 개인적인 약속도 아니고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중에 수많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그런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저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평생 처음으로 어떤 가수의 '팬'임을 자처할 만큼 좋아하고 사랑했던 뮤지션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실망과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대의를 흐리면 안된다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려요. 제 나쁜 점 한 가지가... 전 노래할 때는 아기가 돼요... 저는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에요... 이제는 제가 팀의 일개 구성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리더로서의 책임 의식도 느끼는데, 그걸 너무 늦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게 후회스럽고..."
그의 잠적 때문에 무수히 맘고생 몸고생을 겪어야 했던 동료들과 제작팀에게 저런 정도의 말로 충분한 사과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핑계를 대거나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고 즉시 잘못을 인정하며 후회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은 역시 임재범답더군요.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화요일에 '승승장구'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습니다.
임재범이 처음으로 토크쇼에 출연한다 해서, 더구나 폭풍 입담으로 모두를 사로잡았다는 기사까지 뜨고 해서 정말 재미있을 거라 기대하고 보았는데, 막상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니 저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목구멍에 작은 생선가시가 걸린 채, 뱉어낼 수도 없고 시원스레 넘어가지도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은 답답함과 찜찜함이 계속 느껴졌는데... '바람에 실려' 마지막회를 보면서 그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잡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가수다' 출연 당시에도 저는 임재범의 지나친 솔직함을 우려했었습니다. 굳이 대중 앞에서 그런 말까지 털어놓을 필요는 없는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친구가 없다는 그 한 마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우려를 금할 수 없었는데,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자기 과거의 행적들을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한 어조로, 전혀 체에 거르지도 않고 그대로 방출시키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제 맘이 편할 수 있었을까요?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고 있었던 그의 괴이한 과거에 놀람과 충격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저러다가 훨씬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데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마음에, 저는 방송을 보는 동안 계속 안절부절했습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임재범은 그런 방송 따위에 나와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람에 실려'는 물론이거니와 '승승장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따위'라는 표현은 '바실'과 '승승장구'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폄하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임재범에게는 아주 걸맞지 않는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뜻입니다..) '나는 가수다'의 경우는 괜찮았던 것이, 비록 예능이긴 하지만 가수로서는 그저 노래만 하면 되는 프로그램이었으니까요. 예능적 재미는 가수 한 사람마다 붙어 있는 개그맨 매니저들이 얼마든지 대신 감당하면 될 일이었죠. 가수에게 주어진 기본적 책임은 어디까지나 노래였고, 특히 '나가수' 녹화는 하루만 촬영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청중평가단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일종의 작은 콘서트라고도 할 수 있고, 그 촬영이 끝나면 가볍게 뒷풀이나 하고 집에 가서 쉬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실려'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바실'에서 임재범이 맡은 첵임은 결코 노래만 하는 가수로서의 역할만이 아니었지요. 물론 노래도 해야 했고 작곡에도 참여해야 했지만 그런 음악 작업 외에도...... 그는 예능 프로그램의 책임자로서 '재미'도 뽑아내야 했고, 한 팀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리더쉽도 발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임재범은 그런 역할을 맡길만한 적임자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실려'라는 프로그램이 생긴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기대보다는 염려가 훨씬 컸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을 하겠다고 승낙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미국 음악 여행이라는 컨셉 자체가 임재범의 평생 소원이었더군요. 특히 키클럽에서의 공연 후에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했으니, 왜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승낙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풀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는 적중했습니다. 가수로서의 역할만 하면 될 때는 임재범이 본래 갖고 있는 입담과 재치만으로도 충분히 에이스급의 재미를 줄 수 있었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임재범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더구나 미국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음악 여행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진행되는 생소한 프로그램이니... 천하의 유재석이나 이경규가 메인 MC로 나섰다 해도 과연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물음표에 두고 시작해야만 했던 그 어려운 프로그램을 생판 예능 초보인 임재범에게 맡겼던 것 자체가 방송사의 엄청난 패착이며 무리수였습니다.
제작진 측에서도 설마 이럴 줄은 몰랐겠지요. 전혀 상상도 못한 충격적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을 것이고, 그래서 점점 더 '바람에 실려'는 임재범을 성토하는 방송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은 임재범을 빼놓고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라, 그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멤버들만으로는 전혀 방송을 꾸려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든든한 제2의 리더를 확보해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대중에게는 생소한 얼굴 없는 뮤지션들과 역시 예능 초보인 배우들 몇 명으로만 구성되었으니, 임재범의 빈자리를 채울만한 대책은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50년 동안 이 세상을 살면서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 수준의 의식들조차 갖추지 못했던 임재범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리더로서의 책임이란 무엇인지, 약속을 왜 일방적으로 어기면 안되는지 등등... 이런 당연한 원칙들을 조금은 더 일찍 배우고 깨달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더우기 그는 이제 아내와 딸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이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어쩌면 말이죠......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 엎드려 빛을 못 보고 있던 탁월한 뮤지션 임재범이 어느 날 갑자기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면서, 수많은 대중들은 삽시간에 그의 노래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빠져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나가수'에서 뿜어내던 임재범의 포스는 가히 불가항력이라 할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너무 빨리 '나가수'에서 하차하게 되었을 때, 마치 사랑을 잃어버린 듯 허전하고 슬픈 감정에 젖어든 사람이 오직 저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세상이 그를 원하기 때문에 방송사에서도 무리한 욕심을 부렸던 거겠지요. 어차피 그들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최고의 핫이슈를 몰고 다니는 인기스타를 기용해서 득을 보고자 하는 행위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프로그램을 좀 더 탄탄하게 만들지 못하고 임재범에게만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잘못은 있지만, 그 프로그램을 기획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승승장구'를 비롯한 각종 토크쇼에서 임재범 섭외에 열을 올린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그를 너무 사랑한 것이... 그게 문제였을까요?
'바람에 실려'는 상처투성이로 끝나 버렸습니다. 임재범은 더욱 많은 구설수와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예전부터 그를 시기하고 흉보던 사람들은 "옳타꾸나, 그럼 그렇지!" 하면서 더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당분간 임재범의 고독한 모습을 공중파 TV에서 볼 수 없고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큰 허전함과 아쉬움을 느낍니다. 우선 저부터가 그러니까요. 정말 못말리는 사랑과 집착입니다.
가수 임재범을 사랑한 팬들이... 인간 임재범을 사랑한 가족들이... 어쩌면 임재범의 자유로운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너무 사랑한 세상은, 마치 갇혀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독수리를 새장 속에 가둬버린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중요시하는 '약속' 또한 생각에 따라서는 세상이 정한 원칙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요. 임재범은 원래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산 속의 독수리인데,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까지 와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사랑이 죄는 아니지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그의 슬픈 운명일 뿐이지요. 이제 벗어날 수도 없는 커다란 새장에 갇힌 독수리... 앞으로는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가슴이 더 시려올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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