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이 시대, 드라마에 성자(聖者)가 출현하는 이유 본문
최근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서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지난번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밝고 유쾌한 터치의 드라마보다는 인간의 근본적 슬픔을 다룬 드라마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지요. (슬픈 드라마가 연이어 대박을 치는 이유) 그리고 저는 '신데렐라 언니' 7회에서 또 한 명의 성자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거든요. '신언니'의 성자는 마지막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이전에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자들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선덕여왕'의 덕만 (이요원)
역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임금이지만, 드라마에서 그려진 모습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타인들을 위해 선덕(善德)을 베풀다가 자기의 삶은 모두 희생하고 한 줌의 재처럼 스러져간, 성녀(聖女)와도 같은 임금이었지요.
비담(김남길)과의 첫 만남에서도 그녀는 타인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를 설원랑에게 팔아넘겨 약재를 구하면,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 200명을 구할 수 있다는 비담의 말을 듣고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려 했었지요. 그리고 왕이 되겠다 결심한 것도, 미실의 악행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언니인 천명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복수심에 불타게 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긴 했지만, 오직 그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성군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최대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미실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내치지 않고, 오히려 높이 등용하였습니다. 언제든 자기 목에 칼을 들이밀 수도 있는 위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안위보다도 대의를 중요시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들에는 그녀의 존재론적 고뇌와 정치적 수단이 개입되어 있었기에, 100% 순수한 희생 정신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녀가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매번 어려운 길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한 남자 비담에 대해서도 그녀는 끝까지 믿음과 의리를 지켰습니다. 평생 외로웠던 마음을 그에게 한자락 기대어 보려 하였건만 최후의 순간에 자기를 배신했으니,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나약함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용서하였습니다. 드라마를 시청할 당시에는 오히려 잘 못 느꼈으나, 이제 와 추억하니 아름다웠던 여왕이 참으로 그립군요.
2. '추노'의 대길 (장혁)
깊은 사랑을 하다보니 성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성자여서 그토록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양반집 도령인 대길이는 노비인 언년이(이다해)를 사랑하면서,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괴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피 흘려 세상을 뒤집어 엎는 혁명이 아니라 평화로운 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은 송태하(오지호)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겉으로는 까칠한 척 했지만, 대길이는 사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불행해지는 꼴을 보아 넘기지 못했습니다. 위험한 추노꾼 생활을 하면서도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뒤로 빼돌려 짝귀의 산채로 보내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10년 동안 언년이를 찾아다닌 이유도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으며, 그녀가 이미 가정을 이룬 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의 욕심을 버린 채 오직 그녀의 행복을 위해 한발 물러서서 그녀를 지켜주었습니다.
그가 생활하던 저잣거리의 풍습(?)이라면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는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대길이는 그와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원수는 갚지 않아도 좋으나 은혜는 꼭 갚는 식으로 살아갔던 것이지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송태하를 보호하려 하는 그에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고 황철웅이 물었을 때, 대길은 "그가 내 목숨을 한 번 구해 준 적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송태하에게 목숨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던 황철웅은, 대길의 그 한 마디로 인해 대오각성하게 됩니다. 진정한 1인자가 되는 길,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길을 깨달은 것이지요.
송태하도 언년이도 황철웅도, 최장군과 왕손이도, 그리고 짝귀와 그 산채의 사람들도, 대길의 희생을 딛고 일어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가슴속에 위대한 사랑을 품은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 대길의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인생이었습니다.
3. '신데렐라 언니'의 구대성(김갑수)
처음에는 그저 순진한 중년 남자로 보였습니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송강숙(이미숙)에게 대책없이 말려드는 모습이 안스러웠지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송강숙이 데리고 들어온 딸 은조(문근영)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지더군요. 겉으로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은조를 자기 딸로 받아들여,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교육자도 아니고 붙임성도 없는 그가, 처음 만난 아이를, 머리가 다 커버린 아이를, 그토록 까칠하고 버릇없게 구는 아이를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대성은 한없는 인내심과 넉넉한 사랑으로 은조를 포용했습니다. 고슴도치를 품어 안으면 자기 가슴에 상처가 나는 법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본색을 알면서도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으리라는 점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송강숙이 처음부터 자기의 재산을 노리고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다는 것조차, 언제부턴가 구대성은 알고 있었더군요. 앙큼하게 본색을 숨기고, 자기 앞에서 거짓 눈물과 거짓 웃음을 보이며 살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만가지 정나미가 다 떨어지고, 사랑은 삽시간에 증오로 변할 수 있을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거나 변하기에는, 구대성의 마음속에 지닌 사랑이 너무 깊었습니다.
"왜 괜찮아요? 어떻게 그게 괜찮아요?" 하고 절규하듯 묻는 은조에게 그는 말합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너희 엄마를 가엾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 엄마를 좋아하니까 괜찮다... 내가 뜯어먹히는 편이, 지금 내 곁에 너희 엄마와 네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거, 너희 엄마는 모르게 해라. 알면 애를 쓸거다. 어떻게 만회하나 하고... 그렇게 애쓰는 거... 싫다..." 스스로 뜯어먹히는 희생으로도 모자라, 그는 속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혼자 아픔을 눌러 참습니다. 은조는 이런 그에게 한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제가 어떻게 해야 돼요?"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구대성은 대답합니다. "나를 버리지 마라... 그래 주면 고맙겠다."
구대성은 이렇게, 은조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의 커다란 사랑으로 가장 큰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바로 은조입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자칫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한 영혼을 그가 구해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은조는 비로소 세상에 마음을 열고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성도가의 모든 식구들은 물론이고, 대성탁주를 마시는 소비자들도 구대성의 올곧은 심성과 사랑의 덕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부제를 쓰지 않고 몸에 좋은 술을 만들어내는 정직한 기업인이니까요. 그런데 그가 쓰러졌습니다. 오랫동안 보살펴 온 가족(효선이 외삼촌)에게 배신당해, 평생을 지켜 온 기업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제 은조가 그를 대신해 남은 가족을 지키고 기업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주지 않겠니?" 예고편에서 들려왔던 구대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군요. 은조는 그의 바램을 기꺼이 들어줄 것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아버지"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에는 저도 눈물을 금치 못할 것 같군요.
그리고 제가 궁금한 것은 송강숙의 행보입니다. 과연 끝까지 변함없는 자세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뒤늦게라도 구대성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변화하게 될지 말입니다. 현재까지의 느낌으로 봐서는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저는 송강숙이 구대성의 진심에 감화되어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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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뜨는 드라마에는 이렇게 현실 속에 과연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이기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억누르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주위를 비추는 빛이 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가 되어 타인들을 변화시킵니다.
이전의 드라마에도 물론 선역들이 있었으나, 이렇게 종교적인 느낌마저 풍기는 절대적인 선역은 그리 쉽게 볼 수 없었지요. 시청률이 높은 작품마다 등장하는 성자들의 캐릭터에는 이 시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밝혀줄 누군가를 모두가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드라마 속에 등장한 성자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리고 현실에도 저러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대중의 그러한 염원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겉모습에 속아서 실제로는 성자가 아닌 사람을 그렇게 믿고 따라가게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드라마 속의 인물은 우리 시청자들에게 자기 내면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현실의 인물은 결코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진짜 성자와 가짜 성자를 구분해내는 현명한 눈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차라리 이 세상에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드라마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어 버리는 편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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