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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은 불쌍하지 않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선덕여왕, 미실은 불쌍하지 않다

빛무리~ 2009. 9. 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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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30회에서 보여준 고현정의 출중한 연기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연기하던 김명민의 흡입력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이 빨아들이면서 가치관의 혼란까지 초래했다. 이번에 미실의 눈물을 보며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장준혁의 몸부림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 마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혹자는 미실의 야망을 꿈이라고 말한다. 남들과는 좀 다른 꿈, 남들보다 더 큰 꿈을 가졌을 뿐이라고... 그런데 충분한 능력을 가졌고 평생을 노력해 왔음에도 불공평한 태생적 한계에 부딪혀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는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불공평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미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도 황후가 아닌 것이 싫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남들을 죽이고 짓밟으면서까지 꼭 황후가 되어야만 하겠다는 미실의 그 집요함을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무서운 집착이고 욕심일 뿐이었다.

설원랑에게 아픔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고현정의 원숙한 연기를 보며, 나는 미실의 광기어린 집착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희번덕거리는 눈망울은 결국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미실이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내가 느낀 것은 슬픔이 아니라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공포였다. 나는 그녀의 집착이 무서웠다.

고현정은 정말 대단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에 그대로 빨려들어가, 예전에 장준혁을 대할 때처럼 약간은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물론 방법적인 면에서 잘못하기는 했지만" 이라는 간단한 말로 그녀의 수없는 악행들은 그냥 방구석으로 휙~ 치워버리고, 오직 불공평한 현실 때문에 차별을 받으며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한 미실을 동정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미실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녀 자신도 인정하다시피 황후의 자리가 아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언제나 헌신적인 그녀의 남자들과 수많은 자식들이 있으니 여인으로서도 충만한 삶을 누린다 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지금까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해 왔으니 권력에 대한 욕망도 충족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하고자 하면 무엇이라도 못할 일은 없었다. 다만 황후라는 자리 하나만 갖지 못했을 뿐이다.

미실에게 황후의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왜 그 자리에 그렇게 집착해야만 하는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사연이 있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일 뿐이다. 한 사람의 꿈이 세상을 향하고 타인을 향해 있었을 때, 우리는 마침내 그 꿈을 이룬 사람을 우러러보며 칭송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꿈이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남을 짓밟고 오직 이기적인 욕망으로만 발현될 때, 그가 꿈을 이루었다 한들 그를 칭송할 자는 없다.

그리고 신분의 벽에 부딪혀서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너무도 많다. 선덕여왕의 그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은 따로 있기에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의 불공평함에 억울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정당하게 노력해서 채울 수 있는 만큼 자기의 잔을 채우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고, 그것이 올바른 삶이다.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만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실을 보며 나는 계영배(戒盈杯)를 떠올린다. 계영배는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리게 만들어진 술잔으로서,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미실의 술잔은 70%가 아니라 이미 99%가 채워져 있었는데도 만족하기는 커녕 나머지 1%를 채우지 못했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억울해하니 그 욕심과 집착의 크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나는 '포기할 줄 아는 것' 을 높은 수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게으름을 뜻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최선을 다한 후의 포기를 말함이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롭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한편 미실은 불쌍할 수도 있다. 광기어린 집착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미실이 별로 불쌍하지 않다. 평생 그녀에게 억눌려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떠나버린 천명공주의 그림자가 자꾸만 드리워진다. 미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천명은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그까짓 금수저가 입에 물려 있은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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