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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운 딸 하나' 장라공 출생의 비밀이 실망스러운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잘 키운 딸 하나

'잘 키운 딸 하나' 장라공 출생의 비밀이 실망스러운 이유

빛무리~ 2014. 5. 1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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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운 딸 하나'를 띄엄띄엄 시청하면서 전체적으로 매우 황당무계하고 유치하지만 그래도 높이 살만한 덕목 두 가지쯤은 갖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첫째는 스스로 여자임을 핑계대지 않고 당당히 자기 능력으로 남자들과 동등하게 일하며 경쟁하는 여자가 얼마나 멋진가를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변했다며 입으로는 양성평등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신데렐라의 꿈을 꾸는 여성이 적지 않고, 심지어 '청담동 앨리스'처럼 그런 여자들의 꿈을 정당화시키려는 드라마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껏 드라마 속 여자들은 능력이 있어도 남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자기 실력을 제대로 펼칠 수도, 꿈을 이룰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잘 키운 딸 하나'의 여주인공 장하나(박한별)는 오직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항상 경쟁자 장라공(김주영)을 물리치고 뜻한 바를 이루어냈다. 물론 장라공이 (인격적으로) 워낙 못난 놈이어서 이겨봤자 별로 뿌듯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모든 여건이 불리한 상황에서 언제나 자기 능력으로 승리하는 장하나의 모습에서는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남자인 척 감쪽같이(?) 위장하고 살았기 때문에 여자로서 받는 배려나 특혜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여자임을 애써 숨기며 엄청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렸을 뿐이다. 여자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황소간장'에서 쫓겨난 후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한윤찬(이태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지만, 그건 워낙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안하고 볼 수 있었다.

 

 

둘째는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이나 남성우월주의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늙은 대령숙수 장판로(박인환) 회장의 고집은 가히 절대적이다. 무조건 아들에게만 가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400년을 이어 온 '황소간장'의 전통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유일한 아들 손주인 장라공이 아무리 못나고 나쁜 짓을 많이 했어도 장판로 회장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라공 때문에 몇 차례나 위기에 처한 가업을 번번히 구해낸 사람은 막내 손녀 장하나였지만, 장회장은 오직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장라공은 심지어 할아버지인 장회장을 강제로 병원에 가두는 패륜까지 저질렀지만, 그걸 알면서도 장회장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능력과 인품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능력과 인품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남자라는 이유로 기업의 전수자가 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당하며 불합리하다. 기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장라공은 아직 '황소간장'의 주인이 된 것도 아니면서 각 지역의 장고들을 하나씩 팔아치우고 있으며, 심지어 간장 사업을 포기하고 설진목(최재성)의 SS그룹에 빌붙어 호텔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그에게 대령숙수직을 넘긴다면 400년 전통의 '황소간장'은 불과 몇 개월만에 공중분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장회장은 옳지 않고 부당해도 전통은 지켜야 하는 것이라며 장라공을 고집한다. 잘못된 전통을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큰 폐해를 불러올 수 있는가를 극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장판로 회장이 결국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황소간장'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꾸준히 발전시켜 나갈 사람은 장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네 고집이 아무리 쇠심줄이라도 결국은 꺾이게 될거야!" 하면서,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이어져 온 잘못된 관습이 통쾌하게 와장창 깨지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막판에 생뚱맞은 반전이 일어났다. 장씨 문중의 유일한 아들이며 '황소간장'의 유일한 후계자로 여겨져 온 장라공에게 치명적인 출생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알고 보니 장라공의 친부는 죽은 장민석(이영범)이 아니라 모친 임청란(이혜숙)의 예전 동거남인 조직폭력배 고광철(김진근)이었다.

 

그러니까 술에 취한 장민석을 유혹하여 하룻밤 동침으로 이끌 때, 임청란의 뱃속에는 이미 고광철의 아들이며 장라희(윤세인)의 친동생인 라공이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임청란은 무작정 '그날 밤 잉태된 아이'라며 장씨 집안으로 안고 들어왔고, 실수를 저질렀던 장민석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했다. 장민석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라공은 죽은 장민석이 남긴 유일한 아들로서 인정받게 되어버렸다. 누구보다 조부 장판로가 라공을 든든히 여기고 귀애하니,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한 조각 의심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십여 년만에 밝혀진 출생의 비밀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기극이었다.

 

 

이제 임청란과 장라공 일가가 '황소간장'에서 쫓겨나고 몰락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이 출생의 비밀 때문에 작품의 격은 삽시간에 떨어지고 말았다. 장라공은 원래대로 장민석의 친아들이어야 했다.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딸인 장하나가 400년만에 최초의 여성 대령숙수로 임명된다면, 잘못된 관습을 무너뜨리고 능력과 인품에 따라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작품의 주제가 명확히 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장씨 문중에는 아들이 없어져 버렸다. 아들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딸에게 물려준다는 식이 되고 만 것이다. 덕분에 주제는 희미해지고 드라마는 막장에 가까워졌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간장 만들기 시합을 벌여서 만약에라도 자기가 승리하면 대령숙수로 인정해 달라는 장하나의 청을 이미 장판로 회장은 받아들였다. 이제 장하나가 눈부신 실력을 발휘해 이기기만 하면, 장회장은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대령숙수직을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비록 속마음까지 기꺼워서는 아닐지언정, 그렇게라도 인정을 받는다면 결국은 당당히 제 실력으로 아들을 꺾고 딸의 몸으로 가업을 이어받는 쾌거를 이루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 장라공 출생의 비밀이 드러남으로써 장하나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큰 상관없이 저절로 그녀에게 '황소간장'이 굴러떨어지게 되었다. 김이 팍 샌다.

 

 

 

너무 유치하고 막무가내식의 내용이 많다 보니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주제의식이 뚜렷함을 갸륵하게 여기며 시청하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조금은 허탈하고 실망스럽다. (혹시 작가가 '관습의 타파는 아직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제 종영을 향해 달려가는 '잘 키운 딸 하나'는 자기 능력으로 꼿꼿이 서는 여자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그저 예쁘게 꾸미고 명품에나 환장하며 부잣집에 시집가려고 안달하는 여자들만 줄줄이 나오는 드라마에 비하면 오히려 산뜻하고 기분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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