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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시간여행의 의미, 종영 후 뒤늦은 리뷰 본문

드라마를 보다

'나인' 시간여행의 의미, 종영 후 뒤늦은 리뷰

빛무리~ 2013. 5. 2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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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은 항상 간절했지만 개인적으로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글쓰기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어영부영 쉬다 보니 한 달 이상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쩌다 뭘 좀 써보려고 해도 당최 몰입이 되지 않으니 점점 더 손을 놓게 되더군요. 이건 물론 일신상에 관련된 복합적 원인들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최근 방송된 드라마 중 제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중반까지 흠잡을 데 없는 전개를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계속 반복되는 패턴의 고민과 눈물을 보여주면서 지루함의 덫을 피해가지 못하더군요. 호평 속에 종영하면서 조인성과 송혜교에게 눈부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대중들의 기대치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주었던 모양이지만 제게는 사랑했던 만큼 실망스런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후 '구가의 서', '천명' 등 초반에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작품들조차 점점 기대에 못 미치는 전개를 보여주면서, 글쓰기에 게으름 피우는 나날도 점점 길어져만 갔는데... (드라마를 보는 제 눈이 훌쩍 높아져 버린 건지, 요즘은 웬만해선 성에 안 차네요..;;)

 

그 와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케이블 드라마 한 편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과거 김병욱 PD와 콤비를 이루어 수많은 명품 시트콤을 탄생시켰던 송재정 작가의 최신작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었습니다. 총 20부로 제작된 tvN 드라마였는데, 8회까지는 무심히 관찰 모드로 지켜보던 제가, 9회 말부터는 누가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작품 속으로 급격히 빠져들며 심장이 쫄깃해지는 극도의 카타르시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죠.

 

 

20여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누어 온 친구가 뇌종양에 걸려 수술 중에 비참하게 숨을 거두는 모습을 눈앞에서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의사 한영훈(이승준)... 깜짝 놀랄만큼 리얼한 명품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덕분인지, 그 인물의 고통과 슬픔은 생생히 제 가슴으로 전해졌습니다. 마치 저 자신의 베스트프렌드가 눈앞에서 죽기라도 한 것처럼 몰입되어 글썽글썽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순간 한영훈의 뇌리를 치며 새롭게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 ... 그의 친구이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박선우(이진욱)가 시간여행을 하면서 과거에 떨어뜨리고 왔던 약 한봉지가 놀라운 나비효과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18세의 고등학생 한영훈(이이경)은 친구 박선우의 방 안에서 우연처럼 낯선 약봉지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테모달'이라는 이름의 교모세포종 치료제였습니다. 이미 어린 박선우(박형식)는 20년 후의 미래에서 찾아온 자신과 만난 적이 있었고, 그가 예고했던 일들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면서 시간여행의 실체를 믿게 된 상태였죠.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은 막지 못했으나, 고작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는 자신의 운명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냈으니...

 

 

물밀듯 떠오르는 기억에 한영훈은 죽은 친구의 얼굴을 덮고 있던 흰 천을 황급히 거두는데, 거기에는 박선우가 아니라 낯선 얼굴의 노인이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 복도에 켜져 있는 TV에서 꿈결처럼 들려오는 뉴스 앵커 박선우의 활기찬 목소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13년 1월 1일 새해 첫 뉴스 투나잇,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좀전까지 피투성이의 싸늘한 시체로 눈앞에 누워 있던 친구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과연 기분이 어떨까요? 눈물 가득한 눈으로 활짝 웃고 있는 한영훈의 표정을 볼 때, 저는 그 벅찬 희열에 함께 전율했습니다. 제가 '나인'에 푹 빠져들게 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죠. 이 드라마를 통해 '국민친구'라는 애칭을 얻게 된 배우 이승준은 참으로 멋진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20년 전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신비한 아홉 개의 향... 천신만고 끝에 그것을 손에 넣은 박선우는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이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도 막을 수 있고,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어머니의 비극도 막을 수 있고, 히말라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형도 되살릴 수 있고, 무엇보다 뇌종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도 바꿀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잘못되고 비틀린 현재의 모든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박선우였습니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죠. 무려 일곱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1993년으로 돌아간 박선우는 어떻게든 긍정적 미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결과 2013년의 현실은 점점 더 엉망진창으로 꼬여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실성도 막지 못했고,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뜻밖에도 형이었다는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이죠. 그 위기를 틈타 아버지의 병원을 가로채고 온 가족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수 최진철(정동환)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세상을 주름잡고 있으며, 형의 죽음은 간신히 막아냈으나 그 결과로 박선우 자신은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야만 했던 겁니다. 원래 선우의 형 박정우(전노민)는 실수로 아버지를 죽이고 사랑하는 여자 김유진(이응경)과도 헤어지게 되자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외롭게 떠돌다 히말라야에서 죽을 운명이었는데, 시간여행을 떠나온 선우의 도움으로 김유진과 결혼하게 되자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당시 싱글맘이었던 김유진에게는 윤시아라는 이름의 10살짜리 딸네미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훗날 이름을 민영이로 바꾸죠. 시간여행 이전에는 주민영이라는 이름으로 박선우의 연인이었지만, 시간여행 후에는 박민영이라는 이름으로 박정우의 의붓딸이자 박선우의 조카가 되어 버렸네요.

 

꼬맹이 윤시아가 20년 후의 주민영이라는 건 상상도 못하고 그저 형의 사랑을 도와주려 했던 박선우는 기막히게도 자기 애인과 가족의 굴레로 엮이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잊은 채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는 민영의 모습이 선우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팝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박선우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을 받아들였죠. 더 이상의 시간여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남은 두 개의 향마저 20년 전의 과거에 버리고 돌아와, 뇌종양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갈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흘리고 온 약 봉지가 친구 영훈이에게 발견되는 순간, 그의 운명에는 또 한 차례의 눈부신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영훈이에게 주기적으로 뇌 검사를 받으며 병이 발생할 틈 없도록 예방한 결과, 38세의 박선우는 예정되어 있던 죽음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 남았지요. 죽음에서 되찾은 삶은 시간여행의 선물이요 축복이었으나, 조카가 되어버린 민영에 대한 사랑의 기억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선우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던 탓일까요? 바뀐 현실 속에서는 겪지도 못했던 일들인데, 갑자기 민영도 선우와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군요. 그 정체모를 기억들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혼란에 빠졌던 민영의 마음도 어느 사이엔가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두 사람...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는 삼촌과 조카이기에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었죠.

 

 

그런데 20년 전 과거에 버리고 왔던 향이 기적처럼 선우에게 돌아왔습니다. 18세의 어린 선우가 그것을 소중히 보관하며 20년 동안 지켜왔기 때문이죠. 다시 기회를 얻게 된 박선우는 여덟 번째의 시간여행을 통해 형의 결혼을 막고 원수 최진철을 응징하려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최진철의 비리 때문에 실패하고 맙니다. 어린 박정우는 시간여행을 온 박선우의 설득을 받아들여 경찰서에 자수를 하지만, 경찰은 이미 최진철과 야합해 있었던 거죠. 증거 자료는 곧장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심약했던 어린 박정우는 최진철의 협박에 잔뜩 겁을 먹은 채 예정대로 유진과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며 현실은 다시 제자리 걸음... 그런데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우에게서 향의 비밀을 듣고 모든 기억을 떠올린 박정우는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의 삶을 망가뜨린 자신을 질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군요. 더 이상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박선우는 마지막 향에 불을 붙입니다.

 

마지막 여행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어린 박선우는 어른 박선우의 지시를 받아, 아버지 죽음과 병원 화재 사건의 증거 자료를 갖고 경찰서 대신 언론사를 찾아갔죠. 최진철이 손 쓸 틈도 없이 모든 진실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고, 승승장구하던 최진철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박선우의 시간여행 이전에는 굴지의 '명세병원' 회장으로 군림하며 영화를 누리던 그였지만, 시간여행 후의 바뀐 삶에서는 조그만 '명세의료기' 상점을 운영하는 초라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죠. 게다가 어른 박선우의 전화를 받고 마음을 바꾼 박정우가 결혼식 직전에 자취를 감춤으로써, 박선우는 형의 결혼을 막으려던 최후의 목표까지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13년의 현실은 완벽해졌습니다. 원수 최진철은 죗값을 톡톡이 치른 후 아무 힘없는 노인이 되었고, 박선우는 더 이상 조카가 아닌, 후배 기자 주민영으로 되돌아온 그녀와 예쁜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얄궂게도 마지막 반전이 또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 어처구니 없게도 38세의 박선우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93년의 과거에 갇히고 만 겁니다. 마지막 향을 쓰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참으로 가혹한 운명이었습니다. 설상가상 그를 노리고 달려든 최진철의 차에 받혀 과거에서 숨을 거두는 박선우... 그 날 저녁,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상심해 있던 민영은 어린 날 우연히 마주쳤던 한 사람... 나중에 자기와 꼭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절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네 인생을 망칠 사람이니까 무조건 피하라고 당부하며 죽어가던 한 남자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가 바로 시간여행을 떠난 선우였음을 깨닫고 오열하는 민영...

 

 

순차적인 시간의 진행대로 본다면, 모든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나야 합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박선우와 주민영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낱낱이 되새겨 주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저는 그들의 사랑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던 터라, 마지막회가 적잖이 지루했답니다..;; 간악한 최진철, 심약한 형 박정우, 좋은 친구 한영훈... 주인공 박선우가 이 사람들과 함께 할 때면 무척이나 긴박감 있고 흥미진진한데, 여주인공만 등장하면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면서 맥이 빠지는 느낌..?? 좀 그랬어요. 어쨌든 37세가 되던 해, 박선우는 민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1년 후 시간여행을 하다가 과거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간여행을 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니 닥쳐올 죽음도 막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서 죽었으니 이미 확정된 운명인지, 이 헛갈리는 문제의 정답은 누구도 알 수 없겠죠. 무조건 "믿고 싶은 판타지는 믿고,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면 된다!"고 되뇌이며 편안히 잠을 청하는 선우... 이렇게 '나인'은 일종의 열린 결말 형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9회 말에 보여준 '부활'의 그 짜릿한 기적처럼, 과거에 갇혀 죽은 선우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저로서는 꽤나 실망스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참으로 귀한 것을 깨닫게 해 준, 고마운 드라마였네요. 누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후회스런 일들이 있을테니, 그 시절로 돌아가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기회를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겠죠. 하지만 어차피 현실에서 시간여행이란 불가능한 것... 믿고 싶은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정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현재는 또 미래의 과거가 되고, 미래는 또 어느 순간의 현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숨쉬는 이 시간은 현재인 동시에 과거이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결국 현재를 바꾸는 선택이 됩니다. 설령 그것이 지금 당장의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의 현재라도 말이죠. 부질없이 뒤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을 바로잡으려 할 게 아니라,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과거를 바꾸면 된다는 것... 조금은 식상하고 도덕 교과서 같지만, 이것이 제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드라마 '나인'의 교훈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늘상 잊고 살게 되는 진실 중 하나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언제 떠날까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어쩌면 정답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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