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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배종옥,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 겨울' 배종옥,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빛무리~ 2013. 2. 1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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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바람이 분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분명히 정통 멜로인데, 보면 볼수록 추리물이나 스릴러처럼 섬뜩한 느낌이 짙어지니 무슨 까닭일까요? 여주인공 오영(송혜교)의 죽은 오빠로 위장하고 거액의 돈을 노리며 그녀의 대저택에 침투한 남주인공 오수(조인성), 이 사람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 남자는 별로 독하지도 못하고 음흉하지도 못합니다. 지금은 진소라(서효림)의 농간에 걸려 단기간에 78억을 갚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게 될 처지라 어쩔 수 없이 사기를 치고 있지만, 원래는 이런 일에 취미도 없는 사람이에요.

 

전문 포커 겜블러로서의 뛰어난 실력이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깟 돈쯤은 어렵잖게 손에 넣을 수도 있고, 삶 자체의 목표가 없다 보니 돈에 대한 욕심도 크지 않은 편입니다. 좀 까칠하고 못된 구석은 있지만 타고난 성향은 비교적 투명해서 속이 잘 들여다 보이는 인간이니, 지금 드라마 전체에 스멀스멀 퍼지고 있는 이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원인은 오수가 아닐 거예요.

 

 

진소라의 스폰서인 김사장의 사주를 받고 오수를 협박하는 청부폭력배 조무철(김태우) 때문일까요? 비록 분량은 적지만, 등장할 때마다 물씬 풍겨주는 악역의 포스가 워낙 막강하니 그 사람의 영향력도 결코 부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00일 안으로 78억을 갚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돌아설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렇게 흔해빠진 폭력배로 보였는데, 오수가 몸을 돌리는 순간 어느 새 되돌아와 그의 옆구리에 칼을 박던 조무철의 모습은 흡사 실제로 싸이코패스를 보는 것처럼 실감나는 장면이었어요.

 

"다음엔 오른쪽으로 십센치 더 가줄게. 내가 고분고분 말만 하면, 네가 우리 사이를 아직도 형 동생으로 기억하고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할까봐... 병원 가!" 폭력배치고는 순해 보이는 얼굴에다가 말투도 어눌하고 차분하니 더욱 소름이 끼쳤습니다. 제1회에서 그토록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준 후에도 조무철은 오수의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며 오영의 살해를 권유하는 등, 가장 위험한 인물로서의 포지션을 굳히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조무철은 이미 드러나 있는 칼이죠. 무서운 것은 숨겨진 칼날일 뿐, 대놓고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은 별로 무섭지 않은 법입니다. 더구나 조무철이 오수를 협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니, 약속한 100일이 되어 안전하게 돈을 받아낼 때까지는 실제적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100일 동안은 가장 안전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침입자인 오수도 아니고, 배후 조종자인 조무철도 아니라면, 누굴까요? 도대체 어떤 인물의 존재가 시종일관 혀 밑에 숨겨진 면도날처럼, 마음을 두렵고 불편하게 하는 걸까요?

 

 

비서 일을 그만둔지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모든 사람에게 '왕비서'라 불리고 있는 왕혜지(배종옥)는 죽은 오회장의 정부였습니다. 오회장이 아내와 이혼하면서 어린 딸 영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게 되자, 왕혜지는 서슴없이 또각또각 걸어 들어와 PL그룹 안주인 자리를 차지했죠. 하지만 오회장은 그녀에게 법적인 권한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차가운 남자는 그녀를 한 때의 욕망으로 품었을 뿐 사랑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수십년 동안 아내 역할, 엄마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도 왕혜지는 껍데기일 뿐, 남편의 마음도 딸의 마음도 얻을 수가 없었죠. 어쩌면 그녀는 가장 불행하고 가련한 여인인지도 모르겠어요.

 

3회 후반에 오수는 저택 한켠의 숨겨진 방을 발견하는데, 그 곳에는 영이의 죽은 엄마가 남겨둔 흔적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평소 가족의 일상을 비디오로 찍어두는 것을 좋아했던 듯, 일일이 정성들인 손글씨로 날짜와 제목을 써 놓은 비디오 테잎들이 수북히 쌓였는데 그 안에는 너무나 행복했던 수와 영, 그리고 엄마의 모습들이 담겨 있군요. '1990년, 내 딸 영이의 첫키스'라고 쓰여진 테잎에는 7세의 수와 5세의 영 남매가 함께 물놀이를 하며 장난치다가 오빠 수가 동생 영의 뺨에 뽀뽀를 하는 앙증맞은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무렵 엄마는 영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도 했고, 남매를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 가기도 했었네요. 티없이 활짝 웃는 그들의 표정 속에 불행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어째서 불과 1년만에 모든 행복이 깨어지고 말았던 걸까요? '1991년, 엄마 간 날'이라고 어린아이의 비뚤비뚤한 글자로 쓰여진 테잎에는 6살 영이가 혼자 엄마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녹화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들어왔어. 엄마 아빠는 이혼했지만... 내가 엄마 말 안 들었으니까, 다시 와서 날 혼내 줘... 엄마... 엄마..."

 

"아빠가 자연사라고요?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요? ... 내 눈이 뇌종양 때문이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내가 그걸... 정말 다 믿는 것 같아요?"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을 보이며 왕혜지에게 쏘아붙이는 27세의 오영... 이것은 눈 먼 상속녀의 지나친 피해망상과 히스테리일까요? 하지만 그런 오영의 모습을 본 왕혜지의 머릿속에는 오래 전 기억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무언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왕혜지에게로 다가와 그 손을 부여잡으며 "아줌마, 내 눈이 이상해. 아침에 눈을 떴는데 눈이 안 보여, 아줌마!" ... 라고 말하는 6살 오영... 그런 영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왕혜지... 그 섬뜩한 장면 위로, 더욱 섬뜩한 왕혜지의 목소리가 입혀집니다. "저보고 이제 와서 이 집을 나가 새 인생을 시작하라고요? 아니요, 제 새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어요!"

 

물론 왕혜지의 그 대사는 변호사 장성(김규철)을 향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 귀에는 20년 전 오회장에게 했던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무서운 시나리오를 대충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회장은 한 순간의 욕망으로 비서 왕혜지를 품었다. 그 전까지는 화목한 가정에 문제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그 때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왕비서와의 관계가 들통난 후, 좋았던 부부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혼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로 사랑했던 그들은 진짜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아내가 집을 떠나면서 아들 수를 데려간 것은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겠다는 무언의 약속이었고, 남편은 아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왕혜지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왕혜지는 오회장에게 대답했다. "저보고 이제 와서 이 집을 나가 새 인생을 시작하라고요? 아니요, 제 새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어요!"

 

 

왕혜지는 아마도 오회장을 사랑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류의 인물들은 돈에 대한 욕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할 줄 모르니까, 왕혜지는 자기 안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욕망을 충분히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수 있다. "어제는 기껏 나를 품에 안더니, 오늘은 이 집을 나가 새 인생을 시작하라고?" 사랑하는 오회장에게 버림받은 왕혜지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절대 이렇게 쫓겨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슨 수로 붙어있을 것인가? 순간 엄마 잃고 자기 손에 맡겨진 오영의 모습이 왕혜지의 눈에 들어온다. 까짓, 음식에 장난 좀 치는 게 뭐 어려운 일인가? 6살 어린 나이에도 혼자 비디오를 조작하며 셀카 동영상을 찍을 만큼 똘똘하고 앞가림 잘하던 오영은 천천히 몸에 쌓이는 독기로 차츰 시력을 잃어간다.

 

딸의 눈이 멀게 되자 오회장은 당황한다. 아내가 맡기고 간 자식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눈을 멀게 했으니, 이제 다시 아내를 볼 면목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설마 왕혜지의 소행이라고는 짐작도 못한 오회장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오영의 육아를 맡겨 버린다. 어쩌면 수와 영의 엄마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도, 딸에게 닥친 불행을 알고 난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가 죽기 전에 영을 만나러 오지 못했던 이유는 너무 미안해서였을까? 아니면 그것도 왕혜지의 농간이었을까? ... 아이들이 성장한 후, 영의 친오빠 수가 보낸 편지를 가로채어 남매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처럼, 그 옛날에도 수단 방법을 강구해서 엄마와 딸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걸까? ... 오회장의 심장이 멈추어 비상벨이 울리는데도 의도적으로 모른체 해서 한 때 사랑했던 남자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처럼, 혹시 오래 전 두 남매의 엄마도 감쪽같이 죽음으로 몰아갔던 건 아닐까?]

 

왕혜지는 지난 21년 동안, 오영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철저하게 통제해 왔습니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성년이 된 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여행을 가지 못하게 했고, 스스로 영이의 법정 대리인이 되어 족쇄를 채웠습니다. 오회장이 병들어 누운 후, 왕혜지는 어느 덧 PL그룹 내의 최고 실세가 되어 있네요. 그녀의 허락 없이 오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속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이 아가씨는 영혼의 눈으로 왕혜지의 악행을 지켜보고 있었나봐요. 모든 사람에게 차갑게 마음을 닫아버린 영이지만, 그 중에도 왕비서를 대하는 태도는 더할 수 없는 증오심으로 가득하군요. 남들은 버릇없고 병약한 계집애의 히스테리쯤으로 보고 있지만, 어쩌면 가장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사람은 앞 못 보는 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친오빠가 아닌 걸 알면서도, 못 믿을 놈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오수가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따라다니고, 그러다가 조금씩 오수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오영의 모습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었죠.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고, 영은 삶에 미련이 없습니다. 속아 넘어가도 그만이고, 재산 따위는 빼앗겨도 상관없습니다. 구렁이 같은 왕비서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수 이 녀석을 좀 이용해도 되겠다 싶었나봐요. "어떤 이유로든 내가 죽으면 아무런 조사 없이 이유 불문, 내 유산 전부를 너한테 주겠다는 유언장을 쓰겠다고 내가... 단 조건은 네가 날 죽여 주겠다는 약속... 어때, 내 거래가 맘에 들어?" 오영으로서는 일거양득(?)인 셈이죠. 철천지 원수 왕혜지에게 유산을 넘기지 않음으로써 통쾌한 복수를 함과 동시에, 차마 끊지 못한 질긴 목숨도 버리고 홀가분히 떠날 수 있는 방책이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오수와 계약(?)을 맺고 한패가 되었는데, 이 녀석과 붙어다니다 보니 세상은 의외로 흥미진진한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왕혜지가 만들어 놓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살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영이 앞에 펼쳐진 거죠. 난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유... 길거리의 작은 놀이 하나도 영에게는 천상의 즐거움처럼 다가옵니다. 이렇게 마음껏 소리내어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영이 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에게 수의 존재는 절망의 끝에서 마주친 하나의 희망이니까요. 한 여자의 비뚤어진 집착이 이 모든 불행을 낳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영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찰나의 순간이라 더욱 아름다운 저녁 노을처럼, 너무 슬퍼서 너무 아파서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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