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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조무철(김태우)의 숨겨진 속마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 겨울' 조무철(김태우)의 숨겨진 속마음

빛무리~ 2013. 3. 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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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 8~9회는 다소의 시간 끌기(또는 쉬어가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국의 주중 미니시리즈는 기본이 16회니까 어떻게든 그 분량은 채워주어야겠는데, 이 작품은 원래 기본 스토리가 간략해서 웬만큼 살을 붙이고 옷을 덧입혀도 그만큼 채우기는 빠듯하리라 생각되거든요. 일본 드라마가 거의 그렇듯 원작인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도 10부작으로 종영했고, 문근영 김주혁 주연으로 리메이크 했던 영화는 더구나 총 2시간도 못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16부작으로 늘려 놓으려면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겠죠.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를 왕창 늘려서 지루할 틈이 없도록 하되 원작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거나, 아니면 주어진 얼개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데에 여분의 시간을 쓰는 겁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재미와 긴장감은 더할 수 있겠지만 작품의 주제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고, 후자를 선택하면 일부 시청자들은 살짝 지루함을 느끼겠지만 더욱 깊어지고 발전한 주제를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노희경 작가는 아마도 후자를 선택한 듯 싶군요. 남매이면서 남매가 아닌 오영(송혜교)과 오수(조인성)의 애틋한 사랑은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점점 더해갔지만, 정작 스토리 진행은 제자리걸음이었거든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역시 엄청 달달하긴 했지만 (이를테면 멋진 설경 속에서 누이의 귀에 속삭이던 말..."하지만 지금 내가 너한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은 바로 너야!" 라든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결정적인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5회에서 오수를 졸라 '또 다른 오수의 이야기'를 들은 오영이 누구보다 속 깊은 이해심으로 오수의 인생을 바라보며 위로해 주던 장면같은 것은 8~9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어요. 

 

 

십중팔구 뇌종양이 재발한 듯한 오영의 고통은 날로 더해만 가고, 오수가 조무철(김태우)에게 78억을 갚지 못하면 목숨으로 대신 갚겠다 (울며 겨자먹기로) 약속한 시간도 점차 목을 죄어오건만, 백척간두에 서서 죽음을 앞둔 상황에도 그저 함께 있는 즐거움에 푹 빠진 두 사람은 마치 평범한 연인들처럼 닭살 애정행각을 벌였을 뿐이네요. 서로에게 운명적으로 끌리면서도 남매로 위장된 현실에 갇혀 있기에 두 사람의 마음은 일정 간격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그 아슬아슬함이 더욱 애틋하여 보는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한편에서는 왕혜지(배종옥)와 이명호(김영훈)가 여전히 오수의 정체를 캐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그에 맞서 오수를 지키려는 서브커플 박진성(김범)과 문희선(정은지)의 사랑도 무르익어 갑니다. 장성(김규철)은 그저 사람좋은 아저씨 같지만 역시 유능한 변호사답게 몇몇 증언들을 종합하여 오수의 정체가 가짜임을 알아냈는데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의문이고, 조무철이 건네주었던 문제의 약 때문에 오수의 진심을 오해하게 되어버린 오영은 다시 상처받아 울부짖습니다. 가까워지는 듯 다시 멀어지고, 이해하는 듯 다시 미워하고, 밝혀질 듯 다시 숨겨지는 패턴의 반복이죠.

 

이렇게 스토리 진행을 정지시킨 채 이미지 어필 위주로 진행된 8~9회였지만, 포인트는 단연 조무철의 존재였습니다. 처음에는 악역 중의 악역처럼 보였던 이 인물이 갈수록 양파처럼 속내를 알 수 없어지더니, 이제는 몇 장면 안 되는 비중에도 불구하고 남주인공 오수를 위협할만큼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제껏 오수를 향한 조무철의 마음은 속속들이 증오로 가득차 있는 듯 보였더랬습니다. 첫사랑 문희주(경수진)가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외골수 조무철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만을 유일한 사랑으로 간직하고 있기에, 희주를 자기에게서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임신한 그녀를 매정하게 버려서 처참한 사고로 죽게 만든 오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건 당연했으니까요. 그러잖아도 죽이고 싶은 놈인데, 마침 진소라(서효림)의 스폰서 김사장이 그 녀석을 죽여 달라며 거액의 돈까지 제시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100일의 유예기간을 주긴 했지만, 그거야 지금 당장 죽여버리면 돈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랬을테고... 조무철의 모든 행동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명쾌하게 앞뒤가 들어맞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무철의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어쩌면 그의 속마음이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사뭇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인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더라고요.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가난한 집안이 싫어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누나 선(정경순)은 이제 한국 제일의 뇌전문 의사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누나처럼 가족을 버릴 수 없었던 무철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동생들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지요. 조직도 없이 혈혈단신 비수 한 자루 손에 쥐고 거리를 누비며, 그가 한 짓은 하늘도 땅도 모른다고 해서 '하늘땅'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무서운 인물이지만, 그렇게 살고 싶어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능력도 없는데 딸린 식구는 많고, 그들을 외면할 만큼 독하지도 못했기에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뱀처럼 차가워 보였던 이 남자는, 누구보다 맘 약하고 정 많은 친구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님 은혜로 똑똑하게 태어났으면 그 머리를 가족들 위해서 좀 쓸 일이지, 홀랑 저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나버렸던 누나 선을 무철은 용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뇌에 병이 생겨 고통받던 동생 유철이를 다시 살아나 펄펄 뛰게 만든 것도 선이누나였죠. 언제 어떤 녀석이 또 아플지도 모르는 일인데, 못된 누나라도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이제 무철 자신이 2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말았네요.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불행한 인생의 화룡점정을 찍는 한 방이었습니다. 이제 무철은 파란만장했던 삶을 미련없이 마감하고 꿈에도 그리웠던 희주를 만나러 갈 일만 남았는데, 아직도 유일하게 미련이 남은 듯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오수입니다. 한 때는 친형제보다 더 친한 동생이었지만, 10년 전부터는 악연 중의 악연이 되어버린 녀석.
 
 

아무리 친한 동생이지만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무철은 말했습니다. "내가 희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오수는 간절한 눈빛으로 무철을 바라보며 "나도 희주를 사랑한다. 내가 꼭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던 거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희주의 마음이 오수에게로 향해 있었기에, 무철은 내색조차 못한 사랑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수 이 죽일 놈은 제 아기를 임신한 희주를 차가운 길바닥에 밀쳐내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쳐 버렸고, 서툰 솜씨로 다른 오토바이에 올라 오수의 뒤를 쫓던 희주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이슬처럼 사라져갔네요. 그 이후로는 볼 때마다 뼈를 갈아마시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던 녀석.

 

 

그런데 10년이 흐른 지금, 이 녀석은 다시 예전의 그 눈빛으로 무철에게 말합니다. "선희누나한테 내 동생... 내 가짜 동생 영이 좀 봐달라고 설득해 줘. 돈은 어떻게든 갚을게. 제발 부탁이야. 죄 없는 아이는 좀 살리자고!" 희주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열 아홉 오수의 그 눈빛으로, 이제 그 녀석이 다른 여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쭈, 이 놈 봐라... 싶겠죠. 그런데 오수의 눈앞에 바싹 다가가 목숨 건 사랑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무철의 눈에서 희미한 따스함을 본 것은 저뿐이었을까요? 희주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괘씸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마,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끝까지 꼭 지켜줘라. 화이팅!"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저뿐이었을까요?

 

무철이 동물 안락사에 쓰이는 약을 오수에게 건네준 것은 아마도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시간상으로 보면, 처음 오수를 협박하여 일을 맡길 당시는 조무철이 시한부 판정을 받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오수가 PL그룹에 침투해 공작(?)을 시작한지 얼마 후, 무철은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가짜 동생 오영을 바라보는 오수의 눈빛이 오래 전 희주를 바라보던 눈빛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아있는 2개월의 시간은 너무도 짧기만 한데, 인생의 끝에서 무철이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한때나마 혈육처럼 아끼던 동생... 그리고 무엇보다 희주가 목숨바쳐 사랑했던 사람... 오수를 지켜주는 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머지않아 희주를 만나면 내가 오수를 살려주었다고, 또 다시 잃을 뻔했던 그의 사랑도 지켜주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요?

 

 

사실 오수의 말이 맞습니다. 희주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오수와 무철은 둘 다 가녀린 변명에 의지해 살아왔던 거니까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은 오수뿐만 아니라 무철의 마음도 지독히 괴롭혔지만, 무철은 모든 책임을 오수에게 돌리며 버텼고, 오수는 막을 수 없었던 갑작스런 사고와 어린 시절의 철없음을 내세워 버텨 왔습니다. 사실 희주의 죽음은 불쌍한 그녀의 운명이었을 뿐, 오수에게 책임을 온통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무철도 잘 알고 있었죠. 끈질기게 오수를 탓하며 미워했던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고통스런 세상을 훌훌 떠나 희주의 곁으로 가게 될 날이 다가오니, 굳이 오수를 미워할 필요도 없게 되었지요.

 

오수가 돈을 욕심내서 그 약을 오영에게 주었다면, 무철은 끝내 오수를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수는 예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무철에게도 마지막 희망이 생기는 거겠죠. 오수가 변하지만 않는다면, 다시 예전처럼 비겁한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무철은 끝까지 김사장과 진소라의 덫에서 오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영이의 재발한 뇌종양이 완치될 수 있을지, 그래서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불신과 오해를 거듭하며 위태롭게 줄타기하던 수와 영의 사랑이 무철의 희생을 통해 완성될 거라는 예상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군요. 사이코패스 기질 다분해 보이는 진소라의 집착은 볼수록 섬뜩하고, 그녀 때문에 오수를 질투하는 김사장의 포악성도 날로 더해가는데, 그들로부터 수와 영을 지키는 조무철의 마지막 시간들은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불꽃처럼 더욱 뜨겁게 타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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