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신데렐라 언니'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본문
구대성(김갑수)이 떠난 후, 대성참도가를 지켜야 하는 벅찬 의무가 은조(문근영)의 가녀린 두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그녀는 끝내 아빠라고 불러드리지도 못했던 아버지 구대성을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기에 놓인 대성참도가를 지켜내려 할 것입니다. 대성참도가는 구대성이 평생을 바쳐 양심과 애정으로 일구어 온 기업이며, 그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니까요.
"어쩌지, 구효선? 내가 또 해냈네? 이러다가는 정말 모두 내것이 되고 말겠어." 효선(서우)을 자극하는 은조의 속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은조는 그녀와 힘을 합쳐서 아버지의 유업을 지켜나가려는 것입니다. 대성참도가를 지키는 일에, 구대성의 친딸인 구효선을 제외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은조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진정으로 구대성을 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선이는 아직까지도 허우적대는 중이지만, 머지않아 정신을 차리고 언니와 굳건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 그래야만 하구요.
엄마 송강숙(이미숙)은 여차하면 들고 도망칠 수 있는 자기의 쌈지돈이 중요할 뿐 기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별 도움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조와 효선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우선은 홍기훈(천정명)을 생각할 수 있겠군요. 그는 홍주가의 사람이지만 이복형 기정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를 죽게 한 사람이 기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거든요. (이복형 기정이 기훈에게 전하는 말)
"형 때문에, 내가 저지른 일이 뭔 줄 알아요? 형이 나한테 저지른 일이 뭔 줄 알아요?" 어처구니 없게도 구대성의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그 일부를 기정에게 전가할 만큼, 기정을 향한 기훈의 악감정은 뿌리가 깊습니다. 어쨌든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힘을 다해 자기의 본가인 홍주가의 공격에 맞서 대성참도가를 지켜내려는 결심을 굳힌 듯 하군요. 근본적으로는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이지만, 일단은 두 자매의 협력자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라면 은조의 수호기사인 한정우(택연)를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성실한 일꾼으로서의 능력 외에 다른 뭔가를 보여준 적은 없지만, 은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사람이니까요. 게다가 기훈이가 아버지 홍회장과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고 기훈의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챘으니 그가 상황에 변수를 가져올 확률은 상당히 높아요.
어쩌면 한정우로 인해서 홍기훈의 정체가 밝혀지고, 급기야 구대성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 제공을 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두 자매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쫓아내려 하겠지만, 기훈은 뒤늦은 진심을 토로하며 목숨 걸고 사죄하겠다는 처절한 뜻을 밝히고 어떻게든 대성참도가에 남겠지요.
이렇게 해서 메인 남녀와 서브 남녀까지, 네 명의 주인공이 모두 대성참도가를 지키기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하겠군요. 그런데 이렇게 네 명이나 뭉쳤는데도 솔직히 매우 불안합니다. 홍회장이야 별로 두려울 것이 없지만, 홍주가의 후계자이며 실세인 홍기정(고세원)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적이거든요.
홍기정이 무서운 이유는 그가 '사람이 바로 힘'이라는 진리를 잘 알고, 능란하게 이용하는 사업가라는 점입니다. 홍주가의 모태는 원래 그의 외할아버지의 기업이었다지요. 대를 이어 사업가의 핏줄을 타고난 것인지, 그는 수십년간 아버지를 모시던 늙은 가신(家臣)까지도 자기 수하로 끌어들일 만큼, 사람을 다루는 데에 유능합니다.
사람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작정 대충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의 중역에서부터 비교적 하급에 속하는 부하직원들까지도, 신상에 일어나는 변화와 그 가정의 대소사를 모두 꿰고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변상무님. 막내 아드님이 이번 봄에 대학에 입학하죠? 제가 작은 선물을 마련했으니 시간 좀 내시죠." 하고 말하자 늙수그레한 중역은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하며 놀랍니다.
가볍게 웃으며 좀 더 걸어가다가 문 앞에 기립해 있던 직원을 향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합니다. "무릎 연골 수술한지 얼마 안됐잖아요? 충분히 쉰 건가요?" 그 직원은 황송한 듯 고개를 숙이는데, 그 표정은 이미 감동에 겨워 활짝 웃고 있습니다.
거래처 사람을 상대할 때에도 그의 유연함은 계속됩니다. "우리 사이라면 이 전화 한 통으로 계약이 된 거나 다름없겠습니다만, 형식적으로 문서 한 장씩 나눠 갖도록 하지요. 형식은 계약서지만, 내용은 당신의 회사와 우리 회사가 주고받는 연애편지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업상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닭살이 돋을 지경이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친근한 태도에 경계심이 풀리고 너그러워지게 마련이니, 사람을 대하는 홍기정의 세심함과 유연함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대성참도가의 대표격인 구은조는 자기 혼자서 뭔가를 연구해서 만들어 내는 일에는 대단한 능력을 보이지만, 타인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거의 빵점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에요.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도움을 구하기는 커녕, 원래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과격하기만 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서 모두 떠나버리게 만드네요. 아버지 구대성에게 좀 더 일찍 마음을 열었더라면, 사람을 대하는 그의 성품도 조금은 배울 수 있었을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효선은 이러한 은조의 곁에서 어느 정도 완충 작용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함과 애교를 지녔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홍기정의 능란함을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위기가 눈앞에 닥치면 본능적으로 애교를 부리며 그 자리를 모면해 온, 그 정도의 수준이거든요. 그녀가 빠른 속도로 성장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전망이 밝지 않네요.
여기에 홍기훈의 존재가 더해진다면, 또 한 축의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기정의 능란함에는 역시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을 유연하게 대할 줄 아는데다가, 무엇보다 홍주가의 내부사정을 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까지 폼만 잡았을 뿐, 홍기훈이 뭐 이렇다할 능력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다지 큰 믿음은 생기질 않습니다. 두 자매가 어렸을 때는 그의 말이라면 "달이 네모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신뢰감을 주던 인물이었는데, 급속도로 다크화가 되어버린 지금은 "달이 둥글다"고 해도 왠지 믿기 싫어질 지경이거든요..... 그리고 한정우도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아직은 모르니 그를 믿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어리고 부족한 사람들이니, 제각각의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똘똘 뭉쳐서 힘을 합친다 해도, 홍기정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습니다. 효선이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고, 기훈은 배신의 뒷배경을 깔고 있으니 그게 들통나게 된다면 모두 함께 또 엄청난 진통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며 싸우든가 아니면 차갑게 멀리하든가, 그러면서 지내온 사이다보니 순식간에 일심동체가 되기는 요원해 보입니다. 솔직히 이래 갖고서야 어떻게 무서운 홍기정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싶네요.
동화라고 해서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데다가, '신언니'가 지금까지 흘러 온 분위기로 봐서는 새드엔딩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도 합니다. 은조는 지금까지도 너무 슬펐기에, 그녀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불안함이 좀처럼 가시지를 않네요.
왠지 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왕'이 떠오르는군요. 제가 어려서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었던 작품이거든요. 프랑스의 왕비가 된 착한 셋째딸 코델리아가 못된 언니들의 냉대로 궁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부친 리어왕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할 때, 저는 당연히 그녀가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열 살 무렵의 어린아이였던 저는 무조건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권선징악 류의 동화에만 익숙했기에, 코델리아가 전쟁에 패배하여 병사의 손에 목졸려 죽고, 아버지 리어왕은 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다가 슬픔에 못이겨 절명하는 내용의 끔찍한 결말을 읽게 되자,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요즈음의 드라마에 워낙 새드엔딩이 많다는 점도 염려스럽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중반 이후까지 계속 짙은 슬픔을 그려오던 드라마가 막판에 "그래서 모두모두 행복했답니다..*^^*" 하면서 끝나는 것은 왠지 뭐랄까, 좀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운 느낌을 준다고도 볼 수 있거든요. 회를 거듭할수록 가벼워지기는 커녕 점점 더 무거워지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도 새드엔딩의 그림자를 결코 부인할 수 없기에, 저는 은조의 맑고도 처연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더욱 가슴이 저려옵니다.
은조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를 위해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대성참도가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녀의 아픔에 동화되어 힘들어하면서도 '신언니'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녀의 운명을 나몰라라 외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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