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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칠숙랑(柒宿郞)의 편지 - 소화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칠숙랑(柒宿郞)의 편지 - 소화에게

빛무리~ 2009. 10. 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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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칠숙(柒宿)은 단순한 사내라오. 복잡한 생각은 할 줄 모르오. 마치 갓 부화된 오리새끼가 처음 눈에 띈 것을 어미라고 생각하며 따라다니듯, 처음 배운 것만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무조건 따르며 살아왔을 뿐이오.


내 평생 배운 것이라고는 무예가 전부였고, 아는 것이라고는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었소. 어쩌다가 미실궁주의 은혜를 입어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 후, 나는 다른 생각 없이 그녀의 뜻만을 따라 살아왔지요. 내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아무런 고뇌도 회한도 없었소.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말이오.


아기 덕만공주를 안고 도망치던 당신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계집아이였소. 내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너무도 연약했기에 나는 당신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러나 주인 미실의 명을 받고 당신과 덕만공주를 찾아 나섰던 나의 긴 여행은 무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암흑 속을 헤매야 했고, 단순하여 하나밖에 모르던 나조차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때쯤, 거짓말처럼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났소.

끔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내 평생 해본 적도 없던 무모한 상상을 하곤 하오. 활발한 소녀 덕만공주는 멋모르고 나를 잘 따랐으며, 당신 또한 나를 알아보지 못했던 그 사막에서의 첫 만남이 떠오르면... 만약에,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현명한 사람이었더라면... 내가 미실의 명을 무시하고 나 자신의 뜻으로 삶을 결정할 줄 아는 사내였더라면... 그 사막에서 당신과 덕만공주와 그리고 나와... 이렇게 셋이서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한다오.

이제와 부질없는 생각임을 알지만, 그 상상에 취해 있을 때면 내 평생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황홀한 기쁨이 가슴속에 차오르곤 했소. 당신은 결코 아실 리 없겠지만 말이오.


덕만공주를 구하기 위해 당신은 내 옆구리에 칼을 찔렀소. 그러나 여전히 너무도 연약한 당신의 힘으로는 평생 무예를 익혀 온 나의 단단한 몸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없었지요. 
당신에게 찔려 쓰러지는 순간, 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던 당신과 눈이 마주쳤소. 그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파왔소. 찔린 곳은 옆구리인데 오히려 가슴이 더 아파 왔소. 단순하고 무식한 사내인 나 칠숙은 아직도 그 아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 그 이후로도 당신을 바라볼 때면 그 아픔은 항상 나를 찾아와 가슴을 옥죄곤 했소.

사막의 모래더미 속에 파묻힌 당신을 힘겹게 끌어내면서, 덕만공주를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당신을 살리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더 커지고 있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소. 당신의 눈에는 내가 평생 모르고 살아왔던 무언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오.


당신은 어미도 아니면서 어미보다 더한 마음으로 덕만공주를 감싸안고 있었는데, 그 뜨거운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나는 너무도 궁금하였소.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이 혹시라도 나를 향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꿈을 꾸게 되고 말았소. 스스로도 놀랐으나 그 터무니없는 꿈은 나도 모르게 커다란 나무처럼 자라나서, 평생 기쁨을 모르던 내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었던 거요.

당신은 그토록 그리던 딸 덕만공주를 만나 행복해 보이는군요. 나는 옛 주인 미실궁주의 곁에 돌아와 여전히 예전처럼 무감하게 지내고 있소. 이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우리의 운명이었겠지요. 한때나마 당신을 만나서 꾸었던 꿈은 황야에 피어난 한 송이 흰 꽃처럼, 거친 내 인생에 주어진 단 하나의 선물이었을 뿐이오.

이제 다시 불어오는 피바람 속에 평화는 깨어지고, 당신의 작은 행복조차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는데... 언제나 앞을 바라보며 하나밖에 모르던 내가, 지금은 눈을 돌려 당신을 보고 있소. 세상이 변해도 당신만은 그대로 행복하기를 바라기에, 불나방처럼 피바람 속으로 뛰어들려 하는 내 마음속에 당신의 존재는 가시처럼 걸려 있어서... 당신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찾고 있다오.


당신의 마음속에도 조금은 내가 있을까요? 단 둘이 사막을 헤매며 서라벌까지 먼 길을 돌아오던 그 시절을, 내가 그렇듯이 당신도 가끔은 추억할까요? 숨을 거두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오늘도 당신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리오.

정겹도록 익숙해져버린 가슴의 통증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잘 있어요, 소화(昭火). 어리석게 살아온 이 단순한 사내 칠숙(柒宿)의 평생도, 당신으로 인해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었으니... 부디 잘 있어요.



* 이 블로그에 게시된 '선덕여왕' 관련 모든 편지들은 절대 퍼온 글이 아니라, 저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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