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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살인보다 섬뜩한 소녀의 그 한 마디 본문

드라마를 보다

'유령' 살인보다 섬뜩한 소녀의 그 한 마디

빛무리~ 2012. 6. 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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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작가 특유의 방식에 따라 '유령'은 두 갈래의 사건 진행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최초의 사건과 관련된 난제를 계속해서 풀어나가며 드라마의 큰 줄기를 잡고, 한편에서는 자잘한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전작인 '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사건은 가수 서윤형 살해사건으로 듀스 김성재의 실화를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였는데, 그 사건의 범인이었던 강서연(황선희)의 배경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지요. 그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점점 복잡하게 꼬여가는 와중에 직접적 연관이 없는 다른 사건들이 발생했고, 주인공 윤지훈(박신양)과 고다경(김아중)은 그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면서도 첫번째 사건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윤지훈은 강서연의 연쇄살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참으로 엄숙하면서도 서글픈 결말이었네요.

 

'유령'은 '싸인'과 비슷한 구조이면서도 한층 스케일이 방대해졌습니다. 큰 줄기를 담당할 최초의 사건은 여배우 신효정(이솜) 살해사건인데, 이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마련된 에피소드로서 여배우 장자연의 죽음을 연상케 하는군요. '싸인'의 강서연은 대단한 배경과 악랄한 수단을 지녔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혼자 활동했던 것에 비해, '유령'의 조현민(엄기준)은 팬텀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며 특수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으니 훨씬 벅찬 상대라고 할 수 있겠죠. 심지어 팬텀에는 홍콩의 해커 집단 '대형'까지 연계되어 있으니, 박기영(하데스)의 수완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결국은 박기영도 '싸인'의 윤지훈처럼 자신을 희생시켜 악한 세력의 일부분이나마 제거하려 하지 않을까 싶군요. 어차피 친구 김우현(소지섭)의 이름을 빌려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니, 그 빌린 목숨을 보다 숭고한 방식으로 불태우려 하겠죠. 짐작컨대 '유령'의 비극은 '싸인'보다 더 깊고 아플 것 같습니다.

 

 

박기영과 유강미(이연희)의 힘만으로는 조현민의 팬텀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니 하루 빨리 미친소 권혁주(곽도원) 경감과 손을 잡아야 할텐데, 권혁주는 아직도 김우현의 정체를 캐는 데만 골몰해 있으니 조금은 답답합니다. 차라리 얼른 진실을 밝힌 후 박기영과 권혁주가 의기투합했으면 좋겠네요. 저의 개인적인 취향에는 권혁주의 캐릭터가 썩 못마땅하지만 (그런 성격 매우 싫어함..;;) 일단 손을 잡기만 하면 박기영에게는 가장 든든한 동료이자 지원군이 되어줄 인물임이 분명하니까요. 현재 권혁주는 신참 변상우(임지규) 형사와 함께 1년 전의 남상원 사망 사건을 조사하며, 팬텀의 진실에 한 발짝씩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신효정 사건이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가며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와중에, 유강미의 모교인 성연고등학교에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비록 일회성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유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아마도 성연고 살인사건을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세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팬텀의 거대한 움직임보다도, 조현민의 얼음장같은 미소보다도, 긴 생머리에 하얀 리본을 달고 있던 순진한 얼굴의 한 소녀가 더욱 섬뜩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 같네요.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체포되던 순간, 그녀의 마지막 외침입니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하지 않았어!"

 

 

"난 그 아이들한테 죽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답안지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 죽으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 아이들이 스스로 죽은 거예요!" 벌써 두 명의 동급생을 살해하고 세번째 살인을 계획하다가 발각된 19세 소녀 정미영은 전혀 뉘우치는 기색 없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치 사람의 일을 수학공식에 적용시키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죽으라고 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밀어 떨어뜨리지도 않았으니까, 자기가 죽인 게 아니라고 정말 믿고 있는 눈치였어요. 친구들을 살해한 이유는 겨우 장학금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액수인지는 몰라도 그 장학금을 무려 세 사람의 목숨과 맞바꾸려 했을 만큼, 소녀의 가치판단 기준은 왜곡되어 있었고 윤리의식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이튼스쿨이라 불리는 명문 성연고의 졸업반 학생이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말도 안 돼!" 시종일관 박기영과 유강미의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태클을 거는 바람에 적잖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학생주임 오연숙(진경) 선생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개인적으로 이 여선생이 너무나 얄미웠어요..;;) 그러자 소녀 미영이는 발악하듯 외쳤습니다. "밟히기 싫으면 먼저 밟으라면서요. 지면 끝이라고 그러셨잖아요! 전 배운대로 한 것 뿐이에요.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하지 않았어!" 자기 손목에 은빛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미영이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을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저는 너무나 섬뜩했어요.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수만가지 고민을 지닌 상담자들이 나와서 별별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듣다 보면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게 실감나더군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으니, 한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데서 지독한 고민이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재미삼아 10년 동안 남편을 구타하면서 지내 온 아내의 사연이 방송되었는데,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스튜디오에서 평소 하는 그대로 재현하는 모습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권투선수가 펀치를 날리듯 뒷근육을 쓰면서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질러대니, 아무리 가냘픈 여자라고 한들 그렇게 때리면 안 아플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남편은 아내에게 맞아서 인대가 늘어나기도 하고, 반지의 큐빅이 눈꺼풀에 박히기도 했다는데, 상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내는 특히 남편이 물을 마시고 있을 때, 그 정확한 타이밍에 배를 때렸을 때 가장 쾌감을 느낀다더군요. 출렁하면서 착착 붙는 손의 감각도 좋고, 아파서 물을 내뿜거나 하는 남편의 반응도 재미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남편은 집안에서 맘 놓고 물 한 컵 마실 수 없는 지경인데, 최근에는 설상가상 어린 딸마저 아빠를 때리거나 발로 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엄마가 하니까 따라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 따위는 물론 없겠죠.

 

때리는 아내는 '안녕하세요'에 출연하면서도 속으로 "이게 무슨 고민일까?" 했답니다. 제 기억으로는 방청객 150명 중 138표인가를 얻었던 사연인데, 정작 본인은 예상하기를 대충 20표 정도나 나올까 했다는 겁니다. 객관적 시선으로 보면 명백한 잘못인데, 스스로는 잘못인 줄을 전혀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안녕하세요' 출연자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하지 않았어!" 소녀 미영이의 외침을 듣는 순간, 저는 "이게 왜 고민이지?" 하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친구 권은솔(곽지민)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해하려던 유강미를 만류하며, 김우현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미안해하면서, 은솔이 대신 열심히 살라고" 말했다죠. 그것은 어설픈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준엄한 질책이었습니다. 평생 미안한 마음을 잊지 말라고, 그 무거운 짐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라 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그 질책이 유강미를 살렸습니다. 주저앉았던 그녀를 다시 일으켰고, 새로운 삶을 살게 했으며, 나아가서는 김우현을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안함을 알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인간 본성의 따스함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미안해야 할 상황에서도 미안한 줄을 모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사회적 병리 현상입니다. "나는 배운대로 한 것뿐이에요!" 하고 외치던 미영이의 말처럼,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은 잘못된 교육 방식에서 비롯되었겠죠. 미안한 줄 모른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이니,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무서운 병리 현상을 더 이상 퍼져나가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난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하지 않았어!" 라고 외치던 소녀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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