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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드라마 '정도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스릴 넘치는 극의 전개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정몽주(임호)처럼 꼿꼿한 충신이 매우 멋있어 보이고 이상적인 인간형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금 보니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어딘가 몹시 꽉 막힌 듯하여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가 차라리 연애 편지였다면 좋았으련만, 정몽주가 그토록 사모한 것은 여인이 아니라 쇠잔해가는 고려 왕조였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만 있다면 임금의 성이 왕씨든 이씨든 그게 뭐 중요하다고 목숨까지 바쳤을꼬? 물론 ..
나는 드라마 '정도전'을 볼 때마다 이성계(유동근)와 이방원(안재모)의 모습에서 신비로운 감회에 젖는다. 과거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용의 눈물'과 묘하게 겹쳐지는 데자뷰 현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태종 이방원이었던 유동근은 지금 태조 이성계가 되어 있고, 당시 충녕대군(세종)이었던 안재모는 현재 이방원이 되어 있다. 약 17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과거의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인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곤룡포를 걸치면 그대로 임금이 되고 갑옷을 걸치면 그대로 장군이 되는 유동근의 당당한 풍채가 예전과 다름없는 것도 신비하거니와, 당시 20대 초반의 해사한 외모로 감수성 넘치는 세종의 청년 시절을 연기했던 안재모가 30대 후반의 장년이 되어 냉혹한 이방원으로 변신한 ..
세자 이훤(여진구)에게 자칫 염문이 날까 우려한 성조대왕(안내상)은 서둘러 금혼령을 내리고 세자의 혼례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혼인 적령기에 달한 사대부가의 처녀들에게는 모두 처녀단자를 올릴 의무가 주어졌으나, 사실상 이미 세자빈은 내정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왕가의 혼례는 내명부에서 주관하는 것이고 내명부의 최고 권위자는 대비 윤씨(김영애)였기에, 허울뿐인 간택의 절차를 거쳐서 결국은 이조판서의 딸 윤보경(김소현)이 뽑힐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문관 대제학의 딸 허연우(김유정)를 마음에 품고 있던 세자 이훤은 과감히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며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합니다. 대제학 허영재(선우재덕)의 집안에서도 갈등이 시작됩니다. 세자빈 간택 과정에서 최종 3인의 후보에까지 오른 처녀들은 ..
지난 19회에 이어 20회에서도 주저앉은 세종(한석규)을 일으키려는 강채윤(장혁)의 거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세종이 글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던 계기가 희망 없는 백성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시 말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는 소이(신세경)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고 강채윤은 말합니다. 짐승에게 희망을 걸거나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분노하는 일은 없으므로, 그러한 전하의 마음은 처음으로 백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셨다는 증거라고,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원래 높으신 양반님네들에게 있어 백성과 천것들이란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전하께서는 우리 담이를 사람으로 생각하셨으니 그건 틀림없는 사랑이었다고,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의심하거나 흔들리실 필요가 없노라고 강채윤은 세종..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도, 신하들도, 임금도... 저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끌어안고 날마다 눈물 속에 살아갑니다. 보통은 그 눈물이 꽁꽁 싸매어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때로는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흘러나올 때가 있지요. 12회에서는 특히 그들의 감춰져 있던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보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1. 강채윤의 절규 (똘복이와 담이의 재회) 궁녀 소이(신세경)는 강채윤(장혁)이 붙인 벽보를 보고 어린 시절에 헤어졌던 똘복 오라버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복(福)이라는 글자의 수를 놓다가 훔쳐낸 금실이 모자라서 획수를 빠뜨리고 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던 기묘한 틀린..
"내가 대체 뭘 그리 잘못했느냐? 나는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내 신하들은 지금도 모두 모여서, 내 뜻을 거스를 모의를 한다더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중국의 책력이 아닌 우리의 책력을 만든다 할 때도, 천문기기를 만들기 위해서 중국에 사람을 밀파할 때도, 세법 가부조사를 할 때도, 노비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려 할 때도... 대행 대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사옵니다, 국고가 낭비 되옵니다. 신분 질서가 어지럽혀 지옵니다... 지랄들 하고는... 결국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면서, 온갖 공맹의 도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공자께서 언제 자국의 책력을 만들면 안된다 하셨느냐? 맹자께서 언제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안된다 하셨어? 나는 단지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
"네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진다. 흔들리지 마라..." 국가의 지존이신 임금 세종(한석규)이 한낱 궁녀에 불과한 소이(신세경)에게 내린 어명입니다. 세종의 마음속에 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크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강력한 절대군주 세종이 나약한 궁녀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마음을 의지하고 있다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일이지요? "네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진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말할 만큼, 세종에게 소이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금 또한 사내이니, 세종이 소이를 여인으로 바라보며 사랑하고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그건 아닌 듯 싶습니다. 앞으로 세종과 소이, 그리고 강채윤(장혁)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는 모르나,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봐..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새로운 사극 '뿌리깊은 나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세종조의 한글 창제에 얽힌 비화들을 추리, 액션 등과 결합하여 독특하게 풀어나갈 듯합니다. 초반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이번에는 정말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겠지요? 작가의 이름 때문에 신뢰가 가기는 합니다만, 최근 들어 제법 큰 기대를 가졌던 두 편의 사극에 차례로 실망한 뒤인지라 불안한 마음 또한 적지 않습니다. '계백'은 '상도'와 '다모' 등을 집필했던 정형수 작가의 작품이며, 아역들이 등장하던 초반의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계백의 아버지로 나왔던 차인표의 열연이 더욱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성인 연기자들로 교체되면서 어딘가 심상찮은 삐걱거림이 시작되더니,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달려가..
드라마 '49일'이 종영했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듯 싶으나, 저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면에서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제가 해석하기에 이 드라마의 포커스는 송이경(이요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지현(남규리)에게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신지현은 49일 여행의 고된 일정을 마치고 귀한 3방울의 눈물을 얻어 회생에 성공했으나, 안타깝게도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에게 주어진 목숨은 회생 후 고작 일주일이 더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너무 가엾어서 화가 날 정도로 서글픈 그녀의 운명이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유난히 밝고 긍정적이며 선량함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녀는 타인들을 위한 천사..
요즘 보기 드문 정통 정치드라마로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프레지던트'가 종영했습니다. 낮은 시청률로 고전했지만 저에게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긴,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마지막회를 시청하며 제가 주목한 3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 아버지의 희생 조태호 회장의 악행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명백한 살인교사자이며 비리 기업인입니다. 게다가 그가 선택한 자살의 방법 또한 최악이었습니다. 살인병기 등으로 수족처럼 부리던 황팀장에게 약을 먹이고 운전을 시켰으니 자기 목숨 외에 한 목숨을 더 죽였을 뿐 아니라, 교통사고가 났다면 무고한 다른 사람마저 희생시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습니다. 핸들을 놓고 정신을 잃은 황팀장, 방향을 잃고 무섭게 돌진하는 자동차, 그 뒷좌석에서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