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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짐작컨대 2011년작 '프레지던트'는 손영목 작가의 최대 야심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복잡하고 험악한 정치판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공정한 시각으로 묘사한 '프레지던트'는 정말 수준 높고 괜찮은 드라마였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인 스토리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는 분위기 자체가 매우 낯설고 내용도 어려운 편이었다. 결국 '프레지던트'는 최수종, 하희라 부부의 열연에도 줄곧 4~5% 내외의 낮은 시청률로 고전하다가 경쟁작이었던 '대물', '싸인'의 높은 화제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쓸쓸히 종영을 맞이했다. 특별히 아끼는 작품을 야심차게 선보였으나 대중으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한 손영목 작가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경력 수십년에 이르는 베테랑이라도 결코 면역되지 않는 부분이..
드디어 15년 전 납치 사건의 비밀이 밝혀졌다. 주중원을 납치해서 잔인한 추리소설을 읽히며 난독증에 걸리게 한 사람은 차희주였고, 폭발하는 차량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차희주의 쌍둥이 언니인 한나 브라운이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던 주중원(소지섭)은 이제껏 차희주(한보름)를 생각할 때마다 혼란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납치범의 정체가 자신임을 밝히며 "미안하게 됐어, 주중원!" 하고 말하던 순간의 얼음장 같은 모습과, 불타는 차에 갇혀 죽어갈 때의 애달픈 눈빛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증오해야 할지 가여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었다. 주중원이 사랑했던 착한 한나는 죽었고, 질투심에 눈 멀어 납치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차희주는 뻔뻔하게 살아 ..
'유령' 11~12회에서는 이 드라마의 절대악이며 모든 범죄의 배후조종자인 조현민(엄기준)의 과거가 드러났습니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의 절대악이었던 강서연(황선희)은 선천적 사이코패스에 가까워 사람을 죽이는 데에 타당한 이유가 없었지만, 조현민은 전혀 다르게 설정되었군요. 물론 지극히 냉혹하며 무차별적이라는 면에서는 강서연과 별 차이가 없고, 그 스케일에 있어서는 강서연을 능가하는 수준이므로 사회에 전체적으로 끼치는 해악은 조현민이 훨씬 크다 하겠지만, 그를 희대의 악마로 만들어 버렸던 13년 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니, 저는 조현민을 탓하기에 앞서 이 썩은 사회와 인간의 추악함에 치를 떨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9년, 세상은 한 건의 빅뉴스로 떠들썩해졌으니, 바로 세강그룹 회장 조경문이 무..
김은희 작가 특유의 방식에 따라 '유령'은 두 갈래의 사건 진행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최초의 사건과 관련된 난제를 계속해서 풀어나가며 드라마의 큰 줄기를 잡고, 한편에서는 자잘한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전작인 '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초의 사건은 가수 서윤형 살해사건으로 듀스 김성재의 실화를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였는데, 그 사건의 범인이었던 강서연(황선희)의 배경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지요. 그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점점 복잡하게 꼬여가는 와중에 직접적 연관이 없는 다른 사건들이 발생했고, 주인공 윤지훈(박신양)과 고다경(김아중)은 그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면서도 첫번째 사건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윤..
'유령'은 상당히 특이한 드라마입니다. 보통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1회에 총력을 기울이고 2회부터는 슬슬 힘을 빼는 법이죠. 그래야 첫방송에서 시청자를 사로잡기가 수월하니까요. 최근 시작된 '추적자'와 '각시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숨막힐 듯 진행이 빠르고 역동적이던 1회에 비해, 2회는 현저히 늘어지고 약간은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원래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그런데 '유령'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1회는 첫방송치고 임팩트가 부족하다 싶을 만큼 평이하고 잔잔하더니만, 오히려 2회가 상상초월 대박이군요. 저는 편안히 누워서 보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졸이며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습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이렇게까지 완벽 몰입해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다음 주 종영을 앞둔 드라마 '싸인'은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은 수작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신선한 소재와 잘 짜여진 구성,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잘 어우러져서 긴장을 풀거나 지루할 틈 없이 계속 몰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연기자 박신양에게는 별로 흡족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오히려 아픈 기억의 출연작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신양의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은 '파리의 연인'에서부터 '쩐의 전쟁'까지의 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대역을 맡았던 여배우 김정은과 박진희도 인기를 얻기는 했으나 박신양의 막강한 존재감에 비한다면 미약한 수준이었지요. 한창 물이 올랐던 그 시절에는 "애기야, 가자!"를 비..
요즘 보기 드문 정통 정치드라마로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프레지던트'가 종영했습니다. 낮은 시청률로 고전했지만 저에게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긴,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마지막회를 시청하며 제가 주목한 3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 아버지의 희생 조태호 회장의 악행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명백한 살인교사자이며 비리 기업인입니다. 게다가 그가 선택한 자살의 방법 또한 최악이었습니다. 살인병기 등으로 수족처럼 부리던 황팀장에게 약을 먹이고 운전을 시켰으니 자기 목숨 외에 한 목숨을 더 죽였을 뿐 아니라, 교통사고가 났다면 무고한 다른 사람마저 희생시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방법이었습니다. 핸들을 놓고 정신을 잃은 황팀장, 방향을 잃고 무섭게 돌진하는 자동차, 그 뒷좌석에서 모든..
'시크릿 가든'의 코믹한 김비서로 인기몰이를 했던 김성오가 새로 시작된 대작 '마이더스'에서 고정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싸인'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길래 깜짝 놀랐지요. 더욱 놀란 것은 출연 분량이 지극히 짧은 카메오인데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이 주연급 이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성오가 '싸인'에서 맡은 배역은 오래 전부터 여성들을 상대로 묻지마살인을 반복해 온 싸이코패스입니다. 알고 보니 고다경(김아중)의 동생 다희도 그의 손에 희생되었군요. 동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시신을 보고, 다경은 직감적으로 같은 범인의 소행임을 알아차립니다. 최근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된 남자(김성오)와 1:1로 마주한 고다경은, 5년 전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여고생을 아느냐고..
요 며칠간 느닷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1O84'에 푹 빠져서, 놀랍게도 TV와 컴퓨터를 거의 꺼 놓은 채로 지냈습니다. 알○○ 적립금을 이용해서 1,2,3권 세트를 한꺼번에 구입해 놓은 것이 벌써 지난 여름인데, 그 두께를 보니 도통 엄두가 나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그다지 끌리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먼지 쌓이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인데, 요즘 고질병인 비염 치료를 위해 꽤 먼 곳에 있는 병원을 오락가락하다보니 자연스레 차 안에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그러다가 제1권의 중간부터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십여년쯤 전에 '하루키 중독자'를 자칭하고 다닌 사람 중 한 명이 저였더군요. '태엽 감는 새' 이후로는 뭔가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고,..
한보배는 1994년생으로 올해 18세가 된 소녀 배우입니다. 2002년에 영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데뷔했군요. 요즘 아역배우들은 모두 연기를 너무 잘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인데, 한보배는 제 머릿속에 매우 독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6년에 김상경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조용한 세상'에서였습니다. 사진작가 류정호(김상경)는 타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초감각적 능력을 지녔으나, 그 때문에 학창시절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된 후, 줄곧 세상에 마음을 닫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연처럼 11세의 소녀 수연(한보배)을 위탁 보호하게 되면서, 그녀의 맑은 심성에 감화되어 차츰 다시 마음을 열게 되지요. 나중에 어린 소녀들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에게 수연이 납치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