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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계백'을 2회까지 시청한 후 깨닫게 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주인공 '계백'을 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역 '미실'이 주인공을 제치고 드라마의 상징이 되어 버렸던 '선덕여왕'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김근홍 PD는 전작 '선덕여왕'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악역을 탄생시키는 영광을 맛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악역에게 밀리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기본 원칙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상황이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주인공보다 악역이 부각되면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도 힘들어질 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근홍 PD는 이번 작품에서 전작의 실..
최근 인기를 끄는 드라마에서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지난번의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밝고 유쾌한 터치의 드라마보다는 인간의 근본적 슬픔을 다룬 드라마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지요. (슬픈 드라마가 연이어 대박을 치는 이유) 그리고 저는 '신데렐라 언니' 7회에서 또 한 명의 성자를 발견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거든요. '신언니'의 성자는 마지막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이전에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자들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선덕여왕'의 덕만 (이요원) 역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임금이지만, 드라마에서 그려진 모습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타인들을 위해 선덕(善德)을 베풀다가 자기의 삶은 모두 ..
어제 29일 방송된 MBC 연예대상에서 버라이어티 부문 여자 최우수상은 이경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수상 소감은 그야말로 역동적이었습니다. 강력한 웃음과 강렬한 눈물이 어우러졌거든요.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도 할 말 다 하고, 그 말들의 내용은 재치로 흘러넘쳐, 보는 사람들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녀와 친분을 나누고 있는 동료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이경실의 수상 소감이 끝나고, 시상자였던 박미선이 했던 멘트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울면서 웃기는...... 우리 개그맨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경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선덕여왕'의 미실이 떠올랐습니다. 이경실은 국내의 개그우먼들 중, 가장 드센 이미지..
월요일 방송된 '선덕여왕' 57회에서 비담과 선덕여왕의 멜로가 예상치 못한 급진전을 보이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당혹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제 올렸던 '비담에게 보내는 선덕여왕의 편지' 에서 이미 저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듯이, 비담을 향한 여왕의 마음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껏 덕만은 한 번도 비담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노오란 들꽃을 건네며 수줍게 웃는 비담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보이며 "너는 나를 여자로 대해 주는구나" 하고 기뻐하기도 했고, 미실의 죽음 후 방황하는 비담의 뒤를 쫓아가 어미 잃은 새를 감싸듯이 그를 포근히 안아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
'선덕여왕' 55회에서도 김유신은 변함없이 우직한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 일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신국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김유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애국선열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 충성심에 공감하거나 몰입할 수 없더군요. 엄태웅은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건만, 예쁜 유모차 안에 귀여운 아기 대신 통조림 깡통이 잔뜩 들어차 있는 것처럼 그 충성심이 생뚱맞아 보이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무릇 애국심이라 함은 철저한 체험과 교육에 의하여 고취되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나라를 잃어 보았던 백성들은, 나라 잃은 핍박과 설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그 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애국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꾸준한 교육을 통해..
미실(고현정)이 하차한 후로 서서히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안타까운 드라마 '선덕여왕'... 그 중에서도 제가 보기에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설원랑(전노민)입니다. 물론 시위부령이라는 직책을 가졌으면서도 억울하게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알천랑(이승효)도 있지만, 적어도 그는 '덤으로 사는 인생'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비담의 난'이 일어나면 유신의 편에 서서 듬직한 역할을 해줄 거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설원랑의 모습은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임종 직전의 상태로 수십년을 연명하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설원은 미실과 함께 떠났어야 했습니다. 후사를 돌보아 달라는 미실의 당부를 거역하지 못해 일시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도, 머지않아 미실의 뒤를 따라갔어야..
미실(美室), 그대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나는 그대의 인사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나는 결코 그대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 몸과 영혼이 오로지 그대의 것인 나에게, 그대가 미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마지막 부탁은 나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그대가, 나의 고통을 낱낱이 헤아리실 그대가 나에게 차마 따를 수 없는 명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껏 그대라는 빛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대가 없는 세상이란 나에게 암흑일 뿐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남은 자들을 인도하며 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
운상인(雲上人), 구름 위의 사람이라고 남들은 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 낭도들과 더불어 향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며 청유를 즐기던 당신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요. 당신의 타고난 성정에는 평생 그런 삶이 어울렸을텐데, 이렇게 나를 만나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군요. 사다함을 잃은 후, 나에게 남자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였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고, 나의 미모와 색공에 반해 기꺼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원랑, 당신만은 예외였지요. 갈수록 차갑게 황폐해져가는 내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그대는 이제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셨군요. 나는 기뻐합니다. 그대 미실(美室)은 존재 자체로서 나의 꿈이기에, 그대의 꿈이 커지고 새로워지면 자연히 나의 꿈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내입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동안 깊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대가 평생토록 간직해 온 꿈이 삽시간에 빛바래고 초라해 보일 적에 그대가 느낀 아픔은 죽음보다 깊었을 것입니다. 그대의 아들 비담의 말처럼, 간절한 꿈이란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들지요. 그대 역시 꿈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희생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초라해져 버린다는 그 아픔을 누가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침묵을 이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
더 늦기 전에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 설원(薛原)이 그대 미실(美室)에게 편지를 씁니다. 물론 그대는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제 점점 약해져가는 그대를 보니 내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그대와 같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으니 나는 이 생에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그대의 곁에서라면 나는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그대는 나의 삶이었고, 꿈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내가 좀 더 잘난 사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가 그 허울좋은 성골로 태어났거나, 보다 출중한 능력을 타고났더라면, 그래서 당신의 첫번째 꿈을 이루어 줄 수만 있었더라면... 당신은 그 황후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