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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저는 원래 '특집을 가장한 하이라이트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그냥 틀어만 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꾸준히 못 보고 띄엄띄엄 보신 분들로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하이라이트 방송도 환영하실 법 하지만, 저는 일단 정해놓고 보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는 편이므로, 하이라이트는 거의 보나마나거든요. 역시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중간에 제작진의 인터뷰가 생각보다 좀 길게 들어갔고, 그들이 원래 만들려고 했던 드라마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참고삼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일종의 수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원래 모든 예술이란, 예술가의 손을 떠나게 되는 순간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거든요. 드라마 '선덕여왕' 역시, 원..
너는 믿어야 했다. 세상에 오해보다 더 처량한 것이 있더냐? 너의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믿어야만 했다. 너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는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너는 믿어야 했다. 스승 문노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도 너의 오해였다. 비록 타고난 너의 그릇이 세상을 품을만한 크기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삼한지세를 김유신에게 넘기려 하였지만, 그가 생각한 '대의'를 위해서였을 뿐, 너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엄하고 냉정하게 대했으나 그는 끝까지 너와 함께 가려 결심하고 있었다. 수차례나 그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나와 함께 떠나자." 고 말이다. 문노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여리디 여린 사람의 마음을 지녔기에, 그 한..
어머니,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처럼 지금도 고우시겠지요? 세월의 강을 건너 이제는 장성하였건만, 아직도 저는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어리석은 제 마음을 아신다면 어머니, 무어라 탓하실지 모르겠군요. 어머니가 안 계신 이 땅에 허위허위 돌아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할 것을 알았기에, 저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칼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실은 소름끼치게 강했습니다. 그녀가 제 귀에 속삭일 때, 저는 죽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부모를 내가 죽였노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 앞에, 저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 앞에서 저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원수 앞에서 그렇게 초라했습니다. 미실은 이미 오래 ..
월요일 방송된 '선덕여왕' 57회에서 비담과 선덕여왕의 멜로가 예상치 못한 급진전을 보이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당혹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제 올렸던 '비담에게 보내는 선덕여왕의 편지' 에서 이미 저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듯이, 비담을 향한 여왕의 마음은 결코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껏 덕만은 한 번도 비담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노오란 들꽃을 건네며 수줍게 웃는 비담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보이며 "너는 나를 여자로 대해 주는구나" 하고 기뻐하기도 했고, 미실의 죽음 후 방황하는 비담의 뒤를 쫓아가 어미 잃은 새를 감싸듯이 그를 포근히 안아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감..
나는 왕이다. 비담, 너는 모른다. 너는 왕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지금도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어찌 나를 사랑했단 말이냐. 한 번도 너를 바라본 적 없는 나를, 너는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냐. 평범한 여인에게는 온 세상일 수도 있었을 너의 가슴이, 왕인 나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을, 너는 하필 그 가슴을 나에게만 열었더란 말이냐. 왕의 길을 가려고 유신의 손을 뿌리친 순간부터 나는 사람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었다. 유신도, 춘추도, 너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다. 왕이란 그런 것이다. 정치라는 냉혹한 장기판에서, 이용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여인이라는 사실 또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이유가 있..
미실(고현정)이 하차한 후로 서서히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안타까운 드라마 '선덕여왕'... 그 중에서도 제가 보기에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설원랑(전노민)입니다. 물론 시위부령이라는 직책을 가졌으면서도 억울하게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던 알천랑(이승효)도 있지만, 적어도 그는 '덤으로 사는 인생'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비담의 난'이 일어나면 유신의 편에 서서 듬직한 역할을 해줄 거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설원랑의 모습은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임종 직전의 상태로 수십년을 연명하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설원은 미실과 함께 떠났어야 했습니다. 후사를 돌보아 달라는 미실의 당부를 거역하지 못해 일시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도, 머지않아 미실의 뒤를 따라갔어야..
유신(庾信), 자네를 향한 나의 믿음이 헛된 일이었단 말인가? 나의 판단이 그릇된 것이었단 말인가? 말을 해 보게. 자네의 흉중에 담긴 진정한 포부가 무엇인지를 말일세. 나 월야(月夜)의 두 어깨에는 60만 가야백성의 한과 더불어 내 아버지이신 월광태자(月光太子)의 슬픔이 깃들어 있네. 부친께서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인해 태어나셨으니 명백한 신라왕실의 외손자이셨으나, 신라는 일방적으로 동맹을 깨뜨리고 장군 이사부의 정예군을 보내어 우리 대가야를 공격해 왔네.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인물은 화랑 사다함이었네. 배신당한 우리 대가야의 군사와 백성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네. 가야산에서 흘러내려 온 우리 비옥한 땅의 내천들은 피로 물들었지. 자네는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가야를 점..
드라마 '선덕여왕'이 미실(고현정)의 죽음을 전환점으로 하여 제3부로 접어들었습니다. 제1부는 덕만(이요원)의 탄생과 어린시절 및 자아찾기에 골몰하던 낭도 시절까지였다면, 제2부는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덕만이 미실과 본격적으로 대결을 벌이는 시기였습니다. 이제 최대 강적이었던 미실이 사라지고 덕만은 목표였던 '왕'의 꿈을 일단 이루었습니다. 제3부는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이 시작된 덕만의 삶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분명히 주인공인 덕만 중심으로 스토리가 흘러가고 있기는 합니다. 며칠 전, 한 독자분께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서브 캐릭터였던 미실이 너무 크게 부각되면서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므로, 이제 미실이 사라지고 나서는 차츰..
새주님, 미실 새주님... 세상에 당신 같은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까지 어머니라 부르지도 못하게 하셨으면서, 그 버린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물려주고 가는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쉽게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들었기에 더욱 미워합니다. 어쩌면 당신의 말씀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도 많이 닮았기에, 끝내는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항거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잔인함만 아니셨다면 나는 최소한, 조금은 더 오랫동안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 해도, 당신과는 달랐던 나의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았다면 그 동안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나의 첫번째 꿈은 스승이셨던 문노공께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미실..
친구,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내가 왜 항상 자네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자네의 어머니이신 미실 새주님께 대한 나의 충성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말일세. 이제껏 나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네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제껏 나 자신이 꽤나 처세에 능한 자라고 생각해 왔네. 최고 권력자이신 새주님께 충성하는 것은 나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함이라 여겼으며, 그분의 아들인 자네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나의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네. 나는 가식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은 진심으로 자네와 새주님을 신뢰하고 있었던 걸세. 나는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일세. 내 어린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