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류시화 (5)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내가 당신의 새 차를 몰고 나가 망가뜨린 날을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몹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말했는데도 내가 억지로 해변에 끌고 가서 비를 맞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했잖아!" 하면서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질투나게 하려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당신이 화가 났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떠나리라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오렌지쥬스를 당신 차의 시트에 엎질렀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내게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깜박 잊고 당신에게 그 댄스 파티가 정식 무도회라는 걸 말해 주지 않아서 당신 혼자만 작업복 ..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 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 류시화 '목련' 류시화 시인의 '목련'... 내가 꽤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품이다. 대략 20대 초중반쯤이 아니었나 싶다. 파릇파릇한 그 나..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내가 그린 최초의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 놓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주인 없는 개를 보살펴 주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동물들을 잘 대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란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난 신이 존재하며, 언제나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내게 입맞추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때로는 인생이라는 것이 힘..
언제나 무표정하고 웃음에 인색하던 근엄한 멘토 윤상이, 이번 주 방송에서는 웬일인지 박장대소하며 웃는 얼굴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참가자에게 먼저 성대모사 개인기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노래 '추억 속의 그대'를 부르며 가사를 엉망진창으로 틀려버린 참가자에게, 그래도 가능성을 인정한다며 너그럽게 왕관을 주기도 하더군요. 초반의 딱딱하고 뻣뻣하던 태도에 비하면 어느 새 많이 릴랙스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윤상뿐만 아니라 '위탄'의 멘토들은 방송에 별로 익숙치 않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음악 면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순수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멘토들이 점차로 방송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은, 아마추어 참가자들의 변신보다도 더욱 짜릿한 재미를 느끼..
어찌도 그리 닮았느냐 사소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소인(小人)과 저울대 - 인도의 잠언시 - 류시화의 인도 여행기인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이란 책을 좋아합니다.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라는 곳에서 살아온 우리의 식견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인도인들의 삶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서도 크게 미안해하지 않고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당신과 나의 존재 근원에서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허락도 없이 남의 음식을 집어 먹으며 누군가 소유권을 주장하면, 그것이 어찌 당신의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느냐고 되묻는 뻔뻔한(?) 사람들. 그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란 없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