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기훈 (9)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선거 개표 방송으로 인하여 '나쁜 남자'가 결방되는 바람에 '신데렐라 언니'를 별 기대 없이 본방사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장면에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비록 초반의 기대를 무너뜨린 이번 작품으로 큰 실망을 안겨 주었으나, 역시 김규완 작가는 범상치 않은 저력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은조(문근영)가 세상 다른 일은 모두 잊은 채 환상으로 뒤섞인 기훈(천정명)과의 연애에 심취해 있는 동안, 집에서는 갑자기 어린 동생 준수가 사라집니다. 효선(서우)에게 준수는 평범한 동생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단 하나의 혈육이며, 엄마 송강숙(이미숙)과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끈입니다. 그래서 효선에게 준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한동안 치열했던 수목드라마의 3파전은 종료되었습니다. '검사 프린세스'와 '개인의 취향'은 이미 방송을 마쳤고, '신데렐라 언니'도 이번 주가 마지막 방송이로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검프'와 '신언니' 사이에 묘한 공통점과 엄청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주인공 남녀는 서로 사랑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검프'에서 서인우(박시후)의 아버지는 마혜리(김소연)의 아버지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신언니'에서 구은조(문근영)의 아버지는 홍기훈(천정명)과 그의 집안 사람들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통점입니다. '검프'의 서인우는 초인적 인내심과 희생 정신으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마상태를 용서하고, 그의 딸 마혜리와 사랑을 이룸으로써 ..
은조(문근영)는 타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녀가 입을 열어서 "효선아", 또는 "준수야" 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오랜 세월 동안 애증으로 휩싸인 기훈(천정명)을 향해서도,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떠났을 때에도 그저 새처럼 자기의 이름만 부르며 울었을 뿐입니다. 구대성의 영정 앞에서 "아빠!" 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의 마음 한켠이 열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그것도 자주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정우야, 정우야~"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그녀가 부릅니다. "정우야, 좀 나와 봐", "정우야, 네가 처리해 줄 일이 있어", "정우야, 할 말이 있으니 네 룸메이트 좀 내보내 줘" .....
사실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꾸만 되새기면 너무 아파서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구대성이 그렇게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갔음에, 그리고 가족들 중 아무도 그의 최후를 지키지 못하고 숨을 거둔 후에야 그 곁에 도착했음에,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가 숨을 거두던 그 시간에, 그토록 사랑하던 두 딸은 제 안의 공허감을 술로 채워 보려다가 만취해서 연구실에 쓰러져 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일이 벌어지는데, 그들에겐 하늘같은 존재가 무너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꼭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마지막 순간에 잡아주지 못한 송강숙의 넋나간 표정도 잊을 수 없습니다. "효선아, 아빠 흔들어 봐....
기훈이 네놈은 아버지를 닮았다. 그래서 너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너와 나의 무능한 아버지가 그랬듯이, 너는 초라한 모습으로, 일에도 사랑에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 내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 아버지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오래된 병폐가 있다. 그건 바로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이다. 아버지에겐 수십년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다. 사랑도 얻고 성공도 이룩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자신의 무능함과 비정함으로 저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가 자기 자신을 탓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예전에는 항상 내 어머니를 탓했고, 내가 성장하여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자기 자식인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은 언제나 그 자신이었건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사..
"나의 사랑하는 못된 계집애가 독하디 독한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잡아 달라는 내 간절함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신데렐라 언니' 9회에서는 또 화자가 바뀌었습니다. 초반에 흐르던 은조(문근영)의 나레이션은 드라마의 몰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드라마에 나레이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찬성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괜찮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화자가 효선(서우)으로 바뀌게 되면서, 꼭 저런 것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으로 바뀌더군요. 그래도 뭐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기훈(천정명)의 나레이션이 흐르기 시작하니, 이것은 차라리 드라마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신데렐라 언니' 6회는 굵직한 에피소드보다 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에 할애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랑의 모습은 한정우(택연)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택연의 연기가 충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예상했던 수준보다는 훨씬 나았고, 아직은 때묻지 않아 순수하기 이를데 없는 한정우의 밝은 사랑은, 이미 집안 싸움의 추한 물결에 휘말려버린 홍기훈(천정명)의 어두운 사랑보다 훨씬 더 빛났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상대방을 자기 마음에 맞도록 변화시키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관심도 없게 마련이니 굳이 변화시키려고 노력하..
'신데렐라 언니' 5회에서 은조과 기훈은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보기엔 아직도 너무 어리고 약해 보이는 외모이지만, 문근영은 그 약점을 연기력으로 충분히 커버했습니다. 그리고 천정명도 한결 중후한 느낌으로 변신에 성공했더군요.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염려스럽던 부분이 천정명이었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제는 제법 다크 왕자님의 포스를 제대로 풍기면서 그 어두운 속셈을 궁금하게 만드는 내면 연기도 얼핏 보이니 대견하더랍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를 차갑게 외면합니다. 일단은 오해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은조의 입장에서는 기훈이 말도 없이 떠난데다가, 충분히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년이라는 세월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기' 라는 시도는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에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본다는 그 발상은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역사 속의 실존인물들도 그 새로운 시각에 따라 재조명된 인물이 상당히 많습니다. 심지어 충신과 간신이 뒤바뀌고, 성녀와 악녀가 엇갈리는 사태에 이르러 자칫하면 가치관이 뒤집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각이란 "우리가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악인이 아니었다" 는 인식의 전환일 뿐, 결코 "악인이 좋은 것이다" 라는 가치관의 전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래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착하고 올바른 쪽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