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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겠지만 제 마음 속에도 타인에 의해 모욕당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성역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가톨릭 신앙입니다. 진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가치를 모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절대로 타종교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부정적인 언급도 하지 않으려고 주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일상 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블로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입에서 나오는 말이든 손가락으로 치는 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종교인이 아니라고 해서, 특정 종교에 대해 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움에 한숨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따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새로운 사극 '뿌리깊은 나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세종조의 한글 창제에 얽힌 비화들을 추리, 액션 등과 결합하여 독특하게 풀어나갈 듯합니다. 초반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이번에는 정말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겠지요? 작가의 이름 때문에 신뢰가 가기는 합니다만, 최근 들어 제법 큰 기대를 가졌던 두 편의 사극에 차례로 실망한 뒤인지라 불안한 마음 또한 적지 않습니다. '계백'은 '상도'와 '다모' 등을 집필했던 정형수 작가의 작품이며, 아역들이 등장하던 초반의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계백의 아버지로 나왔던 차인표의 열연이 더욱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성인 연기자들로 교체되면서 어딘가 심상찮은 삐걱거림이 시작되더니,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달려가..
명품 아역들이 활약이 한창이던 드라마 초반, 문근(이민호)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찌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계백(이현우)과 의자왕자(노영학)가 저마다의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영웅의 어린 시절을 폼나게 연기하고 있을 때, 문근은 그저 못난 술집 종업원으로서 걸핏하면 술이나 약을 바꿔치기하며 손님들에게 어설픈 사기를 치다가 발각되어 경을 치기 일쑤였고, 동네 불량배들이라도 나타나면 대적 한 번 하지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떠는 겁쟁이였습니다. 독개(윤다훈) 일당이 외팔이 무진(차인표)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대뜸 그들에게 다가가 "우리 아버지를 왜 찾는데요?" 라고 물었던 녀석도 바로 문근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뇌가 있다면, 저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 자기 아버지를 왜 찾는 걸까 잠시라도 고민해 보아야 마땅하련만..
무진(차인표)이 자기 목숨을 바쳐 의자왕자(노영학)을 살리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의자가 스스로 몸을 날려 무진의 몸에 칼을 찔러넣는 순간, 의자왕의 캐릭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주군과 신하의 관계이지만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둘도 없는 충신을 제 손으로 죽이는 임금이라니, 너무나 배은망덕하고 비겁해 보였거든요. 아역들이 퇴장하고 성인 연기자들이 등장하면서, 너무 급격히 늙어버린 계백과 의자의 모습은 역시 제가 보기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의자(조재현)와 은고(송지효)가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영락없는 아버지와 딸의 분위기가 흘렀고, 한껏 시커멓게 생구(전쟁포로) 분장을 하고 있는 계백(이서진)의 모습에서는 뭐랄까 쿤타킨테의 향기가 났습니다. 하지만 ..
원래 사극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최근 들어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약한 남자'도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가 있지만 사극에서는 절대 '약한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내라도 상관없고, 심산유곡에 은거하는 선비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만 강한 남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스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은 채 모든 비극의 소용돌이를 홈빡 뒤집어쓰고 만다면, 그 무력한 모습으로는 어떤 공감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 방송 중인 '계백'과 '공주의 남자'에서는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초반이라서 그럴 것입니..
무력한 임금이란 동정받기보다 지탄받아야 할 대상임을 '계백' 7회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주인공 계백의 비극은 악역을 맡은 사택가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힘을 갖추지 못한 무왕(최종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무진(차인표)이 목숨 걸고 사택비(오연수)에게서 빼앗아다 바친 살생부는, 역시 예상대로 무왕의 무능한 손아귀에서 조금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강 실세로서 병권마저 장악하고 있는 사택비는 군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궁궐을 제압하였고, 그나마 윤충 장군의 전갈을 받고 외곽에서 지원하러 오던 적은 수의 군사들마저 사택적덕(김병기)에 의해 길목에서 차단당했습니다. 힘의 열세를 지혜로 극복하지도 못한 무왕은 속절없이 폐위될 위기에 처..
사택가문의 사람들이 백제의 권력을 움켜쥐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명석한 두뇌를 지녔고, 권력의 속성에 밝으며,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더없이 비정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무왕(최종환) 역시 뛰어난 지략으로 신라와의 수차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지만, 손에 넣은 살생부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는 무왕의 머릿속은 사택비(오연수)에게 훤히 읽히고 있었습니다. 무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미리 예측하여 모든 대비를 해 놓는 상황이니 이래서는 속수무책,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택비는 자부심과 기개 면에서도 무왕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사택가문의 사람답게 비정하기 짝이 없는 대좌평 사택적덕(김병기)은 살생부를 무왕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자기 딸 사택비를 희생시키려 ..
선화황후(신은정)의 죽음을 목격하고 구사일생 살아남아 궁으로 귀환한 뒤, 의자 왕자(노영학)는 허랑방탕한 바보 흉내를 내며 아버지인 무왕(최종환)에게조차 십수년간이나 속마음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5회에서 본색을 드러냈군요. 극적으로 재회한 무진 장군(차인표)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인데, 왜 살아있는 제가 그 참담한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의자는 생모 선화황후의 제를 모시지 않겠다고, 위패는 그저 나무쪼가리일 뿐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가 효와 예를 다해 모실 분은 오직 사택황후(오연수) 뿐이라고 외치는데, 이복동생 교기(서영주)는 차갑게 비웃으며 "그 말이 진심이라면 저 나무쪼가리를 불태워 버리시라"고 말합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
부모 세대의 피맺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일단락되고, 드디어 주인공들의 아역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실 아역을 맡기에는 이제 꽤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죠. 계백 역할의 이현우와 의자왕 역할의 노영학은 1993년생으로 올해 19세이니 몇 개월만 지나면 스무살의 성인이고, 특히 여주인공 은고의 어린 시절을 맡은 박은빈은 그들보다 한 살 많은 1992년생으로 현재 대학생입니다. 은고 역할의 성인 연기자 송지효와 박은빈의 나이차는 겨우 11세에 불과한 데다가, 설상가상 스무살에 접어든 박은빈의 외모가 급격히 성숙해짐으로써 송지효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지경이니 아역이라고 하기는 좀 민망하더군요. 그래도 계백 역할의 이서진과 의자왕 역할의 조재현은 40대의 장년이라서 아역들과 뚜렷한 차별화가 이루어지니 훨씬 자연스럽게 느..
'계백'을 2회까지 시청한 후 깨닫게 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철저히 주인공 '계백'을 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역 '미실'이 주인공을 제치고 드라마의 상징이 되어 버렸던 '선덕여왕'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김근홍 PD는 전작 '선덕여왕'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악역을 탄생시키는 영광을 맛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악역에게 밀리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기본 원칙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상황이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주인공보다 악역이 부각되면 스토리를 끌고 나가기도 힘들어질 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근홍 PD는 이번 작품에서 전작의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