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소민 (13)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나는 그저 한 명의 시청자였을 뿐이지만 '런닝맨'에 대한 나의 감정이 특별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재작년 여름, 나는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수시로 몰려드는 안좋은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나간 예능 프로그램들을 찾아서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런닝맨'에 꽂히고 말았다. 훈훈한 감동이나 아름다운 경치 따위는 원치 않았다. 그냥 떠들썩하고 유쾌하고 자극적인 볼거리가 필요했는데 '런닝맨'이 정말 딱이었다. 게다가 2010년부터 무려 10년째나 지속되고 있는 장수예능이라 봐도 봐도 끝이 없어서 너무 좋았다. 그렇게 '런닝맨'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던 나의 우울감을 극복하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좋은 치료제가 ..
'보고 또 보고'(1998)의 김지수부터 '신기생뎐'(2011)의 임수향까지, 임성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선택받은 배우들은 로또에 당첨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20년 무명을 견뎌 온 중고신인 장서희에게는 '인어 아가씨'(2002)의 성공으로 배우 인생의 화려한 제2막이 열렸고, '왕꽃 선녀님'(2004)의 이다해와 '하늘이시여'(2006)의 윤정희는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이었지만 임성한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곧바로 전성기에 돌입했다. 물론 '아현동 마님'(2007)의 왕희지와 '보석 비빔밥'(2009)의 고나은처럼 혜택을 누리지 못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임성한의 여주인공은 무명 또는 신인 여배우에게 놓칠 수 없는 대박 기회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로라 공주'(2013)에서..
백과사전에 의하면 '운명론'이란 세상 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여기는 사상이다. 운명론의 특징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논리적인 인간관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점에 있다고 한다. 운명이 전능의 힘을 가지고 인사(人事) 일체를 지배하기 때문에, 예컨대 한 사람이 어떤 날에 죽도록 운명지어지면 사전에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보니 임성한 작가는 운명론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것 같고, 샤머니즘(무속신앙)에 끈질긴 애착을 갖고 있으며, 환생 등의 몽환적 개념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 싶다. 전작들에서도 그런 경향이 적잖이 드러났지만, 특히 '오로라 공주'는 임성한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각종 신앙과 사상과 개념들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
엄밀히 따지면 일처다부는 아니지만, 오로라(전소민)와 설설희(서하준)와 황마마(오창석) 세 사람이 한 집에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일처다부의 향기를 느끼지 않은 시청자가 있을까? 설설희와 황마마가 한 집에서 형님 아우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도 서로 질투하지 않고 의좋게 지내기를 바랐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로망을 거꾸로 재현시켜 놓은 것 같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배우자가 다른 이성을 만나 정을 나누는 것에 눈 뒤집히지 않을 사람 어디 있을까? 질투는 인간 내면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들 중 하나인데, 칠거지악이라는 비인간적 명분을 만들어 그 본능을 오직 여성에게만 악으로 규정하고 억누르도록 강요했던 그 때는 참으로 잔혹한 시대였다. 임성한 작가는 그 잔혹한 시대를 살다..
드디어 설설희(서하준)의 일편단심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 오로라(전소민)는 설설희의 병이 낫든 아니든 상관없이 평생 그의 아내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며 흰 옷을 입고 그의 곁에 섰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응답받지 못한 외사랑으로 오랫동안 힘겨워했던 설설희가 이제 오로라의 진실한 응답을 받아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의 병이 완치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무사히 천수를 누리게 된다면 가장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다 해도 가장 열렬한 소망을 이루었으니 여한은 없을 터이다. 이제 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외아들에게 닥친 병마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을 맛본 설국(임혁) 회장과 안나(김영란) 여사에게도 그보다 더한 위로는 없을 것이다. 결혼식의 축가를 부르는 사람은 록그룹 '부활..
황마마(오창석)의 캐릭터에 치를 떨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오로라 공주'라는 작품을 통해 임성한 작가에게 극도로 실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세간의 따가운 눈총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녀의 작품을 호의어린 시선으로 즐겨 보던 나였지만, 도저히 이 작품은 기분 좋게 보아낼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계속 보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일종의 중독일까? 그냥 무심히 보고 있을 뿐 더 이상 실망할 것도, 더 이상 할 말도 없을 줄 알았다. 스트레스를 못 견딘 오로라가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우고 미친듯이 "What can I do~"를 부르며 시누이들에게 술주정하던 장면에서도 그저 기막혀 웃었을 뿐 더 이상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 1..
오로라(전소민)과 황마마(오창석)의 결혼이 확정되자, 이른바 '욕하면서 보던' 막장 러브라인이 일단은 종결된 셈이라 급격히 흥미가 떨어진 느낌이다. 원래대로 120회에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면 더 이상의 변수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무려 30회나 연장하는 바람에 앞으로도 50회를 넘기는 분량이 남아 있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아무리 드라마 속 일이라도 행복한 결혼식을 보면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신랑 신부가 행복하게 웃을수록 못마땅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동안 이 신혼부부의 염치없는 행위들을 바라보며 꼬여버린 심정은 저절로 또 다른 태풍을 기대하게 된다. 메인 스토리가 제1막을 내리며 한숨 돌리는 요즘,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한창 물이 올..
"얼굴 안돼 보이진 않아요?" 설설희(서하준)의 입에서 이 한 마디가 나오는 순간, 나의 눈시울이 세번째로 젖어들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절실했는지, 이제껏 오로라(전소민)을 향해 왔던 설설희의 마음은 그 한 마디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토록 모질게,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 없이, 끝내 그의 이해와 배려만을 요구하며 이별을 통보한 그녀였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분노가 치밀지 않았으랴! 오로라는 무례한 이별 통보를 끝낸 후 잽싸게 먼저 차에 올라탔고, 설설희가 칼에 찔린 가슴을 채 봉합도 못한 상태로 운전석에 들어오자 "불편하면 따로 갈게요" 라고 말했다. 남자의 인내심을 테스트라도 하는 것처럼, 더 이상 뻔뻔할래야 그럴 수 없는 정도였다. 아무리 몰락했어도 '공주'는 이래서 '공주'인 것일까? ..
아무래도 요즘 임성한 작가는 배우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 같다. 특정 배우를 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막연히 배우라는 직업군에 대한 혐오증이 생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작심하고 배우들 죽이기에 나선 것처럼, 배우들을 향해 휘두르는 작가의 칼날이 매섭기 때문이다. 끝까지 함께 할 것을 약속했던 손창민, 오대규, 박영규 등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중도하차를 당했다. 그러나 현재 남녀 주인공이 직면하고 있는 난감한 상황을 보면 차라리 중간에 잘려나간 중견배우들의 처지가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임성한 작품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홀대받은 적은 없었는데, 당최 어떻게 된 일일까? 오창석과 전소민이 처음 '오로라 공주'에 캐스팅 되었을 때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설렘에 얼마나 부풀었겠..
만약 '주군의 태양'에서 그 멋진 소지섭이 찌질남으로 변신한다면 시청자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그 해맑은 이종석이 스토커로 변신하여 싫다는 이보영을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녔다면 시청자는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의 못난 모습, 인간적으로 봐줄 수 있는 차원이라면 용납 가능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오로라 공주'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는 아직도 오로라(전소민)와 황마마(오창석)를 주인공으로 한 포스터가 걸려 있다. "너무 다른 두 완벽 남녀의 운명적 사랑 스토리!" 라는 표제도 아직은 유효한 모양이다. 그러나 황마마는 이미 주인공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설설희(서하준)의 등장 이후로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을 걸어 왔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었는데, 74회에서 최후의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