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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 성삼문(1418~1456) 아주 오래 전, 학생 시절부터 좋아하던 시조였는데 문득 오늘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2행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제1행과 제3행만 생각났을 뿐 아니라 지은이조차도 누구였는지 가물가물했다. 평생 나름 괜찮은 기억력과 암기력을 자신해 왔건만, 좋아한다면서도 어느 덧 저 짧은 시조 한 수마저 온전히 기억 못하게 되어버린 세월에 나는 고소(苦笑)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나는 10대 고교생이었던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독야청청'이라는 단어에 매혹된다. 흰 눈은 원래 ..
만약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령이와 옷을 바꿔 입고 생전 처음 궐 밖 세상을 구경하던 날, 느닷없이 나의 가마 속으로 뛰어들었던 당신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장부의 기개를 깊숙이 감춰두고 허랑방탕한 모습으로 저잣거리를 떠도시던 그 때, 저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경멸하였더랬지요. 당신과 원치않는 혼례를 올리던 날의 내 심정은 지극히 참담하였으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나는 혼례를 올린 후에도 한참이나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당신을 남편으로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재촉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내 아무리 공주라 하여도 부군을 그토록 멸시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참 못되게 오랫동안 심통을..
이미 왕으로 즉위했으니 '세조'라 호칭하는 것이 맞겠으나 그대로 '수양(대군)'이라 칭하겠습니다. 이 드라마의 분위기에 몰입하여 주인공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세조는 결코 적법한 왕이 아니니까요. "치욕스런 공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공주는 오직 경혜공주마마 한 분뿐이십니다!" 라고 외치던 세령(문채원)의 피맺힌 절규가 귓가에 아른거리니, 저는 이 가련한 여인을 공주라 칭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승유(박시후)와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나, 설령 가능하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 평생 고개 못 들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입니다. 한동안 가슴에 칼을 품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 했던 김승유는, 이제 모처럼 세령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아무도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