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미실 (6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미실(美室), 그대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나는 그대의 인사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나는 결코 그대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 몸과 영혼이 오로지 그대의 것인 나에게, 그대가 미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마지막 부탁은 나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그대가, 나의 고통을 낱낱이 헤아리실 그대가 나에게 차마 따를 수 없는 명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껏 그대라는 빛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대가 없는 세상이란 나에게 암흑일 뿐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남은 자들을 인도하며 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
비담, 내 아가... 이 어미를 원망하느냐? 그래, 원망하여라. 그 힘을 딛고 일어서거라. 그것이 네 어미의 운명이었고, 이제는 너의 운명이니라. 네 어미는 여인으로, 진골 성분으로, 게다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바치던 여인들의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갖가지 잔인한 운명의 족쇄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에게서 색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그저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사다함랑을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다. 차라리 몰랐어야 할 꿈이었다. 찬란한 봄날과도 같았던 그 짧은 행복은 머지않아 산산히 부서져내렸고, 네 어미의 삶은 바뀌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운명에 항거하기 시..
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
운상인(雲上人), 구름 위의 사람이라고 남들은 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 낭도들과 더불어 향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며 청유를 즐기던 당신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요. 당신의 타고난 성정에는 평생 그런 삶이 어울렸을텐데, 이렇게 나를 만나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군요. 사다함을 잃은 후, 나에게 남자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였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고, 나의 미모와 색공에 반해 기꺼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원랑, 당신만은 예외였지요. 갈수록 차갑게 황폐해져가는 내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칠숙랑, 당신보다 내가 먼저 떠나게 되었네요. 나는 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해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아파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막의 모래구덩이에서 나를 살려주었고, 이젠 나의 마지막 길에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주었네요. 당신이 더 이상 내 딸 덕만이를 추격하지 않고 놓아준 것은, 나의 시신을 넘겨줄 사람이 그애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운명은 내게 그리 가혹하지만은 않았어요. 나는 당신 덕분에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켰고,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어요. 살아남은 덕만이가 계림의 좋은 왕이 되어 줄 거라고, 그래서 나처럼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든든히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떠날 수 있었으니까요. 나를 믿어서 혈육을 품에 안겨주신 폐하가 계셨고, 수십년..
사다함(斯夢含), 오랜만에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이 어제처럼 생생한데, 어느새 내 머리 위에는 무정한 서리가 앉았군요. 오직 당신만이 아직도 홍안(紅顔)의 소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 미실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드리는 여인들의 혈통)의 계승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옥진궁주(玉珍宮主)에게서 철저한 색공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수는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러나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잠시나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당신을 잃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의 손만 부여잡고 떠나려 했었지요. 그때는 나 역시 홍안의 소녀였습니다. 기억속에 당신의 모습은 또렷한데 나의 모습은 희..
나 칠숙(柒宿)은 단순한 사내라오. 복잡한 생각은 할 줄 모르오. 마치 갓 부화된 오리새끼가 처음 눈에 띈 것을 어미라고 생각하며 따라다니듯, 처음 배운 것만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무조건 따르며 살아왔을 뿐이오. 내 평생 배운 것이라고는 무예가 전부였고, 아는 것이라고는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었소. 어쩌다가 미실궁주의 은혜를 입어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 후, 나는 다른 생각 없이 그녀의 뜻만을 따라 살아왔지요. 내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아무런 고뇌도 회한도 없었소.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말이오. 아기 덕만공주를 안고 도망치던 당신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계집아이였소. 내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너무도 연약했기에 나는 당신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러..
'선덕여왕' 43회에서 보여준 유승호의 연기력은 그의 인기에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는 논란을 충분히 잠재울만 했습니다. 물론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누구나 '국민남동생' 이며 '누나들의 로망' 이 될수야 없겠지만, 그의 폭발적인 인기가 다만 귀엽고도 훤칠한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은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연기자로서 유승호가 가진 커다란 장점 중 하나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어딘가 비극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슬픈 연기를 잘하는 아역들은 많습니다만 보통은 단지 슬픈 장면을 연기할 때만 눈물을 자아낼 뿐,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심지어는 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역은 별로 없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특성은 슬픔보다는 밝음과 해맑음, 쾌활함의 ..
그대는 이제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셨군요. 나는 기뻐합니다. 그대 미실(美室)은 존재 자체로서 나의 꿈이기에, 그대의 꿈이 커지고 새로워지면 자연히 나의 꿈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내입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동안 깊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대가 평생토록 간직해 온 꿈이 삽시간에 빛바래고 초라해 보일 적에 그대가 느낀 아픔은 죽음보다 깊었을 것입니다. 그대의 아들 비담의 말처럼, 간절한 꿈이란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들지요. 그대 역시 꿈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희생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초라해져 버린다는 그 아픔을 누가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침묵을 이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
선덕여왕 41회의 주인공은 명실상부하게 어린 김춘추(유승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 아이는 종횡무진 대단한 활약을 했습니다. 천하의 미실(고현정)에게 보기좋게 한 방을 먹였고, 모든 사람들의 허를 찌르며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놀라운 지략과 대담한 배포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타고난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더군요. 어차피 하늘의 뜻이 미실을 떠나 덕만과 춘추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41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춘추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말하던 "제가... 미실보다는... 오래 살지 않겠습니까?" 라는 대사였습니다.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세월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지요. 아무리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