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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MBC의 새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은 방송 전부터 여러모로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경성 스캔들'을 집필한 진수완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믿음이 갔습니다. 원작소설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면 망작이 되기 십상인데, 진수완 작가라면 안심해도 될 듯 싶었거든요. '해를 품은 달'은 1년 전쯤 방송되어 인기를 끌었던 '성균관 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정은궐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입니다. 하여 일각에서는 '해품달'을 가리켜 '경복궁 스캔들'이라 부르기도 하더군요..ㅎ저의 개인적 느낌으로는 '성스'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로열패밀리'에서 '공순호' 역할을 맡아 소름끼치는 연기를 보여주었던 김영애가 다시 한 번 강력한 악역으로 돌아왔습니다. ..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새로운 사극 '뿌리깊은 나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세종조의 한글 창제에 얽힌 비화들을 추리, 액션 등과 결합하여 독특하게 풀어나갈 듯합니다. 초반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이번에는 정말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겠지요? 작가의 이름 때문에 신뢰가 가기는 합니다만, 최근 들어 제법 큰 기대를 가졌던 두 편의 사극에 차례로 실망한 뒤인지라 불안한 마음 또한 적지 않습니다. '계백'은 '상도'와 '다모' 등을 집필했던 정형수 작가의 작품이며, 아역들이 등장하던 초반의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계백의 아버지로 나왔던 차인표의 열연이 더욱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성인 연기자들로 교체되면서 어딘가 심상찮은 삐걱거림이 시작되더니,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달려가..
누구인들 쉬운 길로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누구인들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갈채 치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쉬운 선택을 한 사람들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자신부터가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좋은 작품과 인기 많은 작품이 꼭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정한 명작 예술품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작품이 같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외한도 다 아는 원칙을 그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베테랑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다수에게 칭찬받고 시청률을 높이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김병욱 PD가 모를 리는 없습니다. '하이킥3'는 유난히 초반부터 대중의 관심이 높았고, 또 그만큼 질책도 심한 작품입니다. 김병욱은 언제나 그렇듯 자기 고집대..
만약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령이와 옷을 바꿔 입고 생전 처음 궐 밖 세상을 구경하던 날, 느닷없이 나의 가마 속으로 뛰어들었던 당신과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장부의 기개를 깊숙이 감춰두고 허랑방탕한 모습으로 저잣거리를 떠도시던 그 때, 저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경멸하였더랬지요. 당신과 원치않는 혼례를 올리던 날의 내 심정은 지극히 참담하였으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나는 혼례를 올린 후에도 한참이나 마음을 열지 않았고 당신을 남편으로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재촉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내 아무리 공주라 하여도 부군을 그토록 멸시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참 못되게 오랫동안 심통을..
이미 왕으로 즉위했으니 '세조'라 호칭하는 것이 맞겠으나 그대로 '수양(대군)'이라 칭하겠습니다. 이 드라마의 분위기에 몰입하여 주인공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세조는 결코 적법한 왕이 아니니까요. "치욕스런 공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공주는 오직 경혜공주마마 한 분뿐이십니다!" 라고 외치던 세령(문채원)의 피맺힌 절규가 귓가에 아른거리니, 저는 이 가련한 여인을 공주라 칭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승유(박시후)와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나, 설령 가능하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 평생 고개 못 들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입니다. 한동안 가슴에 칼을 품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 했던 김승유는, 이제 모처럼 세령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아무도 믿..
대체 왜 이러십니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분노와 증오 뿐입니다. 그대의 아버지 수양에 대한 분노만이 나를 숨쉬게 합니다. 풍랑이 일던 그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이유도 오직 수양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온 몸은 수양을 향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그 마음을 빼낸다 하면 나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어쩌라고 나에게 이러십니까? 나는 그대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대를 미워하였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경혜공주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날을 떠올릴 때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의 당돌하고도 새침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대가 미웠습니다. 흐드러진 비단옷을 입고서는 얌전치 못하게 말을 타고 싶다면서 승마법을 가르쳐 ..
여주인공 세령(문채원)은 이제 슬슬 민폐 캐릭터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승유(박시후)의 형수와 조카딸 아강이는 노비의 신세가 되어 원수의 일당 중 한 명인 온녕군(윤승원)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세령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가엾은 모녀를 구해 승법사로 피신시킵니다. 역적의 수괴로 몰린 김종서(이순재)의 가족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다른 사람이라면 죽을 위기에 처할 것이나, 수양대군(김영철)의 딸인 세령으로서는 자신의 안위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활약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령은 더 이상 민폐 캐릭터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김승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죽겠다는 협박(?)으로 아비를 설득하려던 모습도..
원래 사극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최근 들어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약한 남자'도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가 있지만 사극에서는 절대 '약한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내라도 상관없고, 심산유곡에 은거하는 선비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야만 강한 남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스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 상황을 타개해 나갈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은 채 모든 비극의 소용돌이를 홈빡 뒤집어쓰고 만다면, 그 무력한 모습으로는 어떤 공감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현재 방송 중인 '계백'과 '공주의 남자'에서는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초반이라서 그럴 것입니..
어린 단종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경혜공주(홍수현)의 사가를 찾아가고, 오누이는 서로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마 정종(이민우)은 친구 신면(송종호)에게 이렇게 말하는군요. "언제나 오늘처럼만 평온했으면 좋겠네. 전하께서도 공주마마께서도 아무 걱정 없이 환히 웃으실 수 있게..." 하지만 신숙주의 아들 신면은 이 평온한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정종의 사람좋은 미소에 화답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궁궐을 비운 그날 밤, 수양대군(김영철)은 네 명의 교자꾼과 한 명의 시종만을 거느린 채 김종서(이순재)의 집을 찾아갑니다. 김종서와 단둘이 마주앉은 수양이 긴히 의논할 것이 있다며 꺼낸 말은, 바로 자신의 장녀 세령(문채원)과 김종서의 막내아들 김승유(..
경혜공주(홍수현)는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현재 가장 비극적인 캐릭터입니다. 남녀 주인공인 세령(문채원)과 김승유(박시후)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사랑을 키워가던 사람과 이별해야만 하는 아픔을 견디는 중이지만, 제게는 그들보다 경혜공주의 고통이 훨씬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원래 경혜공주는 병든 아버지 문종(정동환)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어린 남동생(세자, 훗날의 단종)의 앞날을 지켜주기 위해 우의정 김종서(이순재)의 며느리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부마로 낙점되었던 김승유는 수양대군(김영철)의 마수에 걸려 공주를 희롱했다는 누명을 쓰고 참수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 바람에 김종서는 아들의 목숨의 구하기 위해 수양에게 무릎을 꿇고 정치에서 물러나고 말았으니, 이제 쇠약한 문종의 곁에는 최후의 바람막이조차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