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24)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운상인(雲上人), 구름 위의 사람이라고 남들은 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 낭도들과 더불어 향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며 청유를 즐기던 당신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요. 당신의 타고난 성정에는 평생 그런 삶이 어울렸을텐데, 이렇게 나를 만나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군요. 사다함을 잃은 후, 나에게 남자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였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고, 나의 미모와 색공에 반해 기꺼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원랑, 당신만은 예외였지요. 갈수록 차갑게 황폐해져가는 내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칠숙랑, 당신보다 내가 먼저 떠나게 되었네요. 나는 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해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아파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막의 모래구덩이에서 나를 살려주었고, 이젠 나의 마지막 길에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주었네요. 당신이 더 이상 내 딸 덕만이를 추격하지 않고 놓아준 것은, 나의 시신을 넘겨줄 사람이 그애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운명은 내게 그리 가혹하지만은 않았어요. 나는 당신 덕분에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켰고,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어요. 살아남은 덕만이가 계림의 좋은 왕이 되어 줄 거라고, 그래서 나처럼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든든히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떠날 수 있었으니까요. 나를 믿어서 혈육을 품에 안겨주신 폐하가 계셨고, 수십년..
공주님, 힘을 내셔야 합니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셔서는 안됩니다. 공주님의 그 가녀린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도 크고 무겁습니다. 힘겨우신 모습을 보면서도 항상 이렇게 다그칠 수 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저 김유신(金庾信)은 멸망한 가야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겪으며 고통받고 있는 가야 유민들의 앞날이 제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제 아버님 서현공께서 목숨을 걸고 어머님 만명공주와 무리한 혼인을 감행하셨던 것도 오직 연모 때문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 삶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저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
사다함(斯夢含), 오랜만에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이 어제처럼 생생한데, 어느새 내 머리 위에는 무정한 서리가 앉았군요. 오직 당신만이 아직도 홍안(紅顔)의 소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 미실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드리는 여인들의 혈통)의 계승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옥진궁주(玉珍宮主)에게서 철저한 색공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수는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러나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잠시나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당신을 잃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의 손만 부여잡고 떠나려 했었지요. 그때는 나 역시 홍안의 소녀였습니다. 기억속에 당신의 모습은 또렷한데 나의 모습은 희..
나 칠숙(柒宿)은 단순한 사내라오. 복잡한 생각은 할 줄 모르오. 마치 갓 부화된 오리새끼가 처음 눈에 띈 것을 어미라고 생각하며 따라다니듯, 처음 배운 것만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무조건 따르며 살아왔을 뿐이오. 내 평생 배운 것이라고는 무예가 전부였고, 아는 것이라고는 주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었소. 어쩌다가 미실궁주의 은혜를 입어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 후, 나는 다른 생각 없이 그녀의 뜻만을 따라 살아왔지요. 내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아무런 고뇌도 회한도 없었소.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말이오. 아기 덕만공주를 안고 도망치던 당신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계집아이였소. 내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너무도 연약했기에 나는 당신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그러..
그대는 이제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셨군요. 나는 기뻐합니다. 그대 미실(美室)은 존재 자체로서 나의 꿈이기에, 그대의 꿈이 커지고 새로워지면 자연히 나의 꿈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내입니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동안 깊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그대가 평생토록 간직해 온 꿈이 삽시간에 빛바래고 초라해 보일 적에 그대가 느낀 아픔은 죽음보다 깊었을 것입니다. 그대의 아들 비담의 말처럼, 간절한 꿈이란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들지요. 그대 역시 꿈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희생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초라해져 버린다는 그 아픔을 누가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침묵을 이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
춘추(春秋)야, 내 아들 춘추야, 머나먼 길에 고단한 몸으로 돌아온 너를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 줄 수만 있었다면 구천(九泉)에서도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았으련만, 이 못난 어미는 너에게 한 조각 힘도 위로도 주지 못한 채 이처럼 차가운 땅 속에 누워 있구나. 가엾은 내 아들 춘추야, 부디 굳건하게 너를 지켜야 한다. 네 어미는 언제나 겉으로는 강한 척하려 애썼으나 속은 그렇지를 못했어. 나는 너무 약했고 매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떨고 있었다. 세 번째 남동생을 또 잃으신 어머니 마야황후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황후전 밖에 서 있었을 때, 눈앞에 독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었단다. 미실은 몸을 낮추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고는 귀에 속삭였지. "너 때문이다..." 춘..
내 딸 덕만공주와 사막에서 헤어지고 난 후, 몇 년간이나 칠숙랑(柒宿郞)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군요.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힘이 무엇인지를 말이예요. 당신의 강인한 생명력이 그 모래더미 속에서 결국 나를 구해냈으니, 나 또한 그 힘의 신세를 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한동안 덕만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었지요. 아시나요? 사람은 말이지요. 자기가 꼭 지키고 싶은 것 하나만 있어도 그걸 붙잡고 살아갈 수 있거든요. 내게는 덕만이가 그런 존재였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시녀로 입궁해서도 심부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넘어지고 뒤집어 엎으며 사고를 쳤지요. 백정(伯淨)왕자님을 처..
어머니, 소자 춘추(春秋)이옵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너무 늦게 돌아와 마지막 싸늘한 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춘추이옵니다. 겨우 말을 배울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리워만 하다가 때로는 원망도 하였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시던 그 애틋한 모습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열 밤, 스무 밤보다도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며 울먹이시는 어머니 앞에서, 철없는 저는 놀러가는 아이처럼 마냥 들떠 있었더랬지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록 저와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울고 계셨지만, 얼마나 젊고 고우셨는지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원망합니다. 이모님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는 여전히 고..
나, 비담은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야. 다들 알지? 하지만 이번에 밝혀진 또 다른 비밀은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어. 스승님이신 문노공이 일찌기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 오셨던 그 대업이 바로 '삼한일통' 이라는 것 그 자체는 별로 충격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 대업을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 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지금껏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부모이지만, 이제 나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역시 스승님이 숨겨두셨던 사주단자와 황실 서고의 기록을 통해서 나는 내 정체를 알 수 있었지. 나는 진지왕과 미실궁주의 아들, 왕자 형종(炯宗)이었던 거야. 내 신분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덕만공주였어. 나는 이제껏 내가 스스로 원해서 무언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