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여우누이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적(敵)은 네 안에 있느니라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구미호 여우누이뎐

'여우누이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적(敵)은 네 안에 있느니라

빛무리~ 2010. 8. 4. 12:45
반응형


'구미호 여우누이뎐' 10회에서는 구미호(한은정)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퍽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군요. 이것은 공포 드라마가 아니라 일종의 심리 드라마, 또는 추리 드라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 공포물보다 추리물을 훨씬 더 무서워하는 독특한 경향이 있거든요. '전설의 고향'의 귀신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고, '스크림' 류의 영화에 나오는 연쇄 살인마도 끔찍하기는 하지만 크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아가사 크리스티 극장' 류의 추리물은 너무나 무서웠어요.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 뾰족한 칼날이 숨겨져 있는 느낌이랄까요? 서늘한 냉기는 끊임없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차츰 소리없는 공포는 깊어져 갑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진범의 존재가 밝혀지면, 언제나 가장 선하고 순진해 보이던 의외의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주도면밀한 계획을 짜서 살인을 저지르고는 담담히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그 모습이 회상 장면 등으로 흘러나오면, 그 순간의 오싹하고 서늘한 느낌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던 평범한 사람, 도저히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사람,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내 마음 속의 신뢰는 깨어지고 맙니다. 언제나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깨어지는 신뢰였습니다.


'여우누이뎐'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옛날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구미호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는지, 그녀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복잡한 심리 게임에 가깝습니다. 끔찍한 장면이 별로 등장하지 않아서 얼핏 보기에는 안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심리 게임은 그 무엇보다 잔인한 복수입니다.

이제 윤두수(장현성)의 가족들은 그 누구 하나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의 가장 큰 골은 윤두수와 양부인(김정난) 사이에서 드러났습니다. 원래 이들 부부의 사이는 별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동딸 초옥(서신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일심단결하고 있었기에 신뢰도는 높은 편이었지요. 그러나 기억상실증을 가장한 구미호 구산댁이 돌아오면서, 부부 사이의 신뢰는 완전히 깨어지고 맙니다.


구미호는 설당과자에 약을 섞어서 초옥을 잠들게 하고, 딸을 찾으러 나선 양부인을 납치하여 연이(김유정)가 죽었던 그 동굴의 칠성판 위에 결박했지요. 양부인이 깨어나자 초옥이 관 속에 누운 채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물불 안 가리고 지켜내는 것이 어미 아니겠느냐? 너도 어디 한 번 네 새끼를 잘 지켜 보거라." 양부인이 구미호를 자극하기 위해 모든 사실을 뻔뻔하게 제 입으로 밝히며 했던 그 말이 정말 빨리도 그녀 자신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약에 취해 잠들어 있던 초옥은 그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윤두수 역시 구미호의 미색과 약에 취해서, 자기가 잠들었던 시간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새벽까지 구산댁과 정담을 나누다가 한식경 정도 눈을 붙였던 거라고 생각하기에, 윤두수의 귀에는 양부인이 밤새 겪었다는 모든 일들이 황당한 거짓말로 들릴 뿐입니다. 칠성판에 묶여 있던 밧줄의 흔적이 팔목에 선홍빛으로 남아 있건만, 조금도 믿을 마음이 없는 윤두수는 아내가 투기에 사로잡혀 구산댁을 모함하기 위해 자해까지 했다고 몰아붙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조강지처이며 초옥의 모친인 그녀를 집에서 내쫓으려고 할 지경입니다.

양부인 역시 윤두수를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습니다. 딸자식을 죽여 놓고 그 어미를 다시 집안으로 끌어들인 남자를 어찌 믿는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구미호는 이미 그녀 앞에서 본색을 모두 드러냈기에, 구미호로 인해서 초옥이가 위험에 빠질 것을 양부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두수는 계속 구미호를 감싸고 도는 상황입니다. 구미호에게 완전히 속고 있거나, 아니면 구미호의 미색에 빠져서 진실을 외면하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간에 이미 양부인으로서는 남편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이지요.


어린 초옥이도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는 푹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산 속에서 죽을 뻔 했다는 둥 난리를 치다가 끙끙 앓아 누워버린 어머니가, 초옥이 눈에는 아주 이상해 보입니다. 호랑이 간을 구해다가 자기를 살려 주었던 아버지가 그 말이 나오기만 하면 얼굴이 굳어지는 것도 이상하고, 어머니가 아픈데 모른척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가 먹은 것이 호랑이의 간이 아니라 연이의 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 끔찍한 사실을 자기에게 속인 부모를 이제 초옥이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첩의 아들들까지도 윤두수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 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연이에게 정이 들어 버렸던 윤충일은 "나으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연이가 불쌍하다" 고 말했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에서 윤두수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초옥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연이를 잔인하게 죽여버린 윤두수를 충일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온 가족의 믿음은 산산히 깨져 버렸고, 특히 연이를 죽인 원흉 윤두수는 아내와 자식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존경과 신뢰와 애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미호가 여기서 멈추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면 굳이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복수가 되었다 싶을 지경이군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비극을 구미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불신의 씨앗에, 구미호는 물을 주어서 싹을 틔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서로간에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아무리 구미호가 계획적으로 사이를 갈라 놓는다 해도 어찌 이런 결과가 나타났겠습니까? 적(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 있었던 것이지요.

과연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믿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가족을, 친구를, 이웃을...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을까요? 나 자신의 내면을 그들에게 꾸밈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을까요? 이 질문들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참혹한 죄를 짓고 복수의 대상이 되어 파멸해 가는 윤두수 가족의 모습이 더욱 서글픈 것은, 자꾸만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Daum 아이디가 있으신 분은
 버튼을 누르시면, 새로 올라오는 제 글을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천에는 로그인도 필요 없으니,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의 손바닥 한 번 눌러 주세요..^^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