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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이선영(하시은)의 편지 - 황철웅에게 [추노 편지 3]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추노

'추노' 이선영(하시은)의 편지 - 황철웅에게 [추노 편지 3]

빛무리~ 2010. 1. 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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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원해서 혼인하신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원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이 마음... 한 번도 당신께 전해 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말은 커녕 글로도 제대로 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 한 번도 이 집안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지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이 공간에서, 햇빛조차 받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 저의 운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태어날 때에는 성한 몸을 지녔었다는데, 가장 행복했을 그 시절을 저는 기억할 수가 없군요. 두 살 되던 해에 급작스런 열병을 앓고 나서 이렇게 되었다던데, 두 살난 어린아이였던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했을까요?

제가 성한 몸 그대로 성장하였더라면 아버님은 혁혁한 세도가와 사돈을 맺어 세력을 넓히셨을 것이나, 이런 몸으로 죽지도 않고 나이가 찼으니 고민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저의 혼인 날짜가 잡혔노라고 말씀을 전하셨을 때, 저는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한 번도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 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저에게, 혼인이란 두려움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장부와 한 방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더한 두려움은 저의 이런 모습을 처음 대하셨을 때 서방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혼례식 날, 제 눈에 비친 서방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헌헌장부이며 옥골선풍이시더군요. 저러한 미장부(美丈夫)가 나 같은 여인에게 장가를 들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였지요. 그런데 놀라우면서도 가슴 한켠으로는 설레임과 기쁨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내 안에 그런 감정이 들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어이없게도 서방님의 자태를 뵙자마자 멈추어 있던 제 가슴은 뛰기 시작했던 겁니다.


고맙게도 서방님은 제 몰골을 보고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셨습니다. 웃어 주지도 않으셨지만 화를 내지도 않으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가 좋아서가 아니라 아버님 때문에 애써 견디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저는 기뻤습니다. 철이 들면서 이미 제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숨만 쉬며 살아왔는데, 서방님과 같은 낭군을 맞이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제 삶에는 하루하루 기다림과 희망이 생겼습니다. 기나긴 장마 때에 비쳐드는 햇빛처럼, 잠시 얼굴만 비추고 가신다 해도 좋았습니다.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살아온 시간들에 비하면 천국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저의 배필이고 저의 서방님이시니까요.


그런데 아버님이 당신을 옥에 가두다니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아버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항거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고통과 죽음뿐입니다. 끝까지 항거하면 아버님은 당신을 죽이고, 또 다른 빈한한 양반 가문의 인재를 골라 저의 배필로 들이실 것입니다. 아버님이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아버님께 맞서면, 그렇게 우리는 헤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애타는 가슴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저는 서방님과 헤어지기 싫습니다. 비록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제가 가진 것 중에 오직 하나 온전한, 제 안에 품어 온 깊은 정을 당신께 드렸는데, 이제 와 떠나시면 또 다른 누구에게 정을 옮겨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그리 못합니다. 절대 아버님께 맞서지 마세요.


다행히도 이 마음이 전해졌던 걸까요? 아버님은 당신을 풀어 주셨고, 당신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무심히 먼 하늘을 쳐다보는데, 문득 알 수 없는 슬픔과 불안이 이 가슴을 칩니다. 예전에도 가끔씩 이런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애써 부인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쉽게 떨쳐낼 수가 없네요.

혹시 제 아버님이 정말 나쁜 사람인가요? 수단이 매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식인 제 눈에 아버님은 결코 나쁜 분은 아니었습니다. 정치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고들 하였습니다. 아버님이 정말 나쁜 분이라면, 저렇게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목숨 걸고 항거할 만큼, 아버님이 그렇게 나쁜 일을 시키셨나요? 차마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악행을, 혹시 당신이 지금 아버님의 명에 따라 저지르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두살배기 어린 저에게 찾아왔던 열병은 아버님께 내려진 형벌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버님은 무서운 분이지만, 그래도 여식인 저를 죽이거나 버리지는 못하셨으니까요. 하늘의 새도 떨어뜨릴 세도가이며 귀인이신 아버님이, 평생 이렇게 뒤틀린 팔다리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자식을 보면서 살아가셔야 하다니, 이 얼마나 절묘한 하늘의 형벌입니까? 정말 그런 건가요?


하지만... 형벌의 도구가 되어버린 제 운명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미안하기 싫어서 저는 애써 부인합니다. 만약 사실이 그런 거라면 저는 당신께 너무나 미안해질 것이고... 죄책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면, 마음껏 사랑할 수가 없게 됩니다... 생전 처음 맛보는 사랑의 기쁨을 그렇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저는 오늘도 애써 고개를 저으며, 밀려드는 불안을 잠재우고 그저 당신을 기다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기에, 이렇게 한없는 설레임으로 오늘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니 서방님, 빨리 오세요.  bzQe5HClpkfLO--iwoEswXv6iOP1m_QlwFOfAnDNmj8,


* 관련글 : '추노' 언년이의 편지 - 대길에게 [추노 편지 2] 
              
'추노' 송태하의 편지 - 소현세자에게 [추노 편지 1]  

* 드라마 '추노' 관련 모든 편지들 역시 저의 창작물입니다. 불펌은 절대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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