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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비빔밥, 임성한 작가의 지독한 디테일 본문

드라마를 보다

보석비빔밥, 임성한 작가의 지독한 디테일

빛무리~ 2009. 10. 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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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비빔밥' 9회에서는 비취(고나은), 루비(소이현), 산호(이현진), 호박(이일민) 사남매의 연합공격에 결국 집에서 쫓겨나는 부모 궁상식(한진희)과 피혜자(한혜숙)의 에피소드가 다뤄졌다. 가히 한 가족 모두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니만큼, 9회 방송분의 98% 가량을 그 에피소드로 가득 채우고도 아직 여파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부모자식간의 설전은 그야말로 선명한 피를 튀길 듯이 격렬했다. 임성한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순하고 평범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던 '보석비빔밥'도 제9회를 통과하면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임성한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무지하게 시끄럽다. 다들 너무나 말이 많다. 등장인물 중에 과묵한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심지어는 말솜씨가 없거나 어눌한 사람조차 없다. 하나같이 청산유수에 조목조목 따져가며 말들을 어찌나 잘하는지, 현실에 사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임성한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면 완전 바보가 될 것이다.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아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드라마를 볼 수 있다.


보석 사남매와 부모간에 거의 30분에 걸쳐 지속된 피튀기는 설전은 그러한 '임성한식 대사발'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남매가 부모에게 퍼부어댄 내용은 그 양만 해도 엄청나다. 최근의 일들과 옛날의 일들, 중요한 일들과 사소한 일들이 제멋대로 섞여 있어서, 한편으로는 어처구니 없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현실적인 느낌도 들었다. 남매들이 미리 서로 짜고 퍼부어댈 말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사람수가 많은데다가 개성도 다르다보니 중요한 일들만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략 주워섬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피혜자의 경우다.
돈도 없으면서 600만원 들여서 가슴확대 수술하기. 빚까지 내서 천만원짜리 굿하려고 하기. 딸이 학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자기 빚 갚기. 사이비종교에 빠져서 돈 날리기. 돈이야 있건 없건 사시사철 관광다니고 노름하기. 음주가무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기. 딸이 다니는 학교에 와서 대뜸 기부를 하겠다고 잘난체해놓고는 나중엔 할부로 하면 안되겠냐고 해서 망신주기. 딸이 방송작가라고 떠벌리고 다녀서, 드라마작가도 아닌데 온동네 아줌마들에게 오해받아 난처하게 만들기. 비취가 어렸을 때 싫다는 아이를 굳이 새들 속에 밀어넣고 사진을 찍느라고 결국 아이에게 새를 무서워하는 트라우마 심어주기... 뭐 이 정도다.


다음은 궁상식의 경우다.
보증 서기. 주식으로 집 날리고 나서 또 주식으로 집 날려서 계속 집 평수 줄이기. 평생 수도 없이 바람 피우기. 그래놓고 아내가 자기를 안 믿어줘서 그랬노라고 책임 돌리기. 결국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에 밖에서 자식까지 낳아 데리고 들어오고. 바람피우는 여자에게 돈 쓰느라 자식들 급식비도 안 챙겨주기.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자식들에게 주사부리기. 자는 아이들 깨워서 생뚱맞게 가방 검사하고 더럽다고 트집잡기. 그러다가 한두마디 말대꾸하면 뺨 때리기. 자식들이 집에서 귀여워하며 키우던 개를 냉큼 잡아먹기. 밖에 나가서 툭하면 마누라 험담을 해서 자식들로 하여금 온 동네 창피하게 만들기... 이 정도다.

그리고 자식들 보는 앞에서 시도때도 없이 물건을 집어던지고 그릇을 깨뜨려가며 볼썽사납게 싸워대기, 이 부분은 궁상식과 피혜자의 공동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숨이 넘어갈 듯이 울며불며 소리지르며 저 긴 대사를 치면서 애원한 끝에 승리는 보석 남매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무나 괴로워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으니 일단 떨어져 살아보자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항복하고 각기 할머니들의 집으로 짐을 싸서 나간 것이다. 물론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양쪽 할머니들이 모두 받아주지 않겠노라고 서로 밀어대는 상황이라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다.


내가 대략 정리를 해보니 부모의 중요한 잘못은 3가지로 압축된다.

1. 경제적으로 워낙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쳐서 자식들을 돈 때문에 힘들게 했다.

2. 궁상식의 경우, 너무 바람을 많이 피워서 가족의 신뢰에 금을 가게 했다.
3. 서로 너무 자주 싸움으로써 자식들에게 화목한 가정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위에 나열된 내용 중에도 경제적인 부분과 궁상식의 바람에 대한 부분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차라리 언급되지 않는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조차 드는 사소한 일들이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싫다는 자기를 억지로 새들 사이에 밀어넣고 사진을 찍는 바람에, 그 후로 새를 무서워하는 트라우마가 생겨서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비취의 주장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그 정도의 사소한 일로 평생동안 새만 보면 뇌가 오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는 설정도 무리이거니와, 설령 결과가 그리 되었다 해도 부모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였을 뿐인데 서로 별거를 결정하는 이 중요한 시점에 언급될 만큼 큰 잘못이 아니었다.

그리고 트라우마 극복은 가능하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대부분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치료를 받으면 완치된다고 알고 있는데, 엄연한 성인인 비취가 어렸을 때 새들 속에서 사진 한 방 찍었다고, 자기가 평생 이렇게 새를 무서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모두 부모 탓이라며 악을 쓰고 울부짖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다.

그리고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먹었다거나, 술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가 주사를 좀 부렸다거나 하는 일 역시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므로, 부모에게 별거를 요구하는 자리에서 다 큰 자식들이 입에 담을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 사이사이에 어처구니 없을 만큼 사소한 내용들을 섞어서 약 30분 가량을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으니 연기자들도 기진맥진 했을 법 하다.


게다가 부모가 집을 나가고 난 후에도 말싸움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언제나 티격태격 앙숙인 세입자 카일과 둘째딸 루비 사이에 또 설전이 벌어졌다. 아침에 된장찌개를 서영국(이태곤)에게만 주고 자기에게는 안줬다고 카일이 항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서 된장찌개 안 좋아할 줄 알고 안줬다는 루비에게 카일은 "나 엄마가 한국사람이라 된장찌개 좋아해요. 된장찌개, 김치찌개 없어서 못 먹어요. 서형보다 내가 이 집에 더 먼저 들어왔어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끝도없이 따지면서 들이댄다.
정말 대단들 하다. 현실이라면 그런 것을 갖고 따지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말을 꺼내더라도 "좀 서운했어요" 정도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리고 루비도 피곤하게 일일이 맞대응하는 게 아니라 "미안하게 됐네요" 이 정도로 말하고 끝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에피소드도 그렇지만 임성한 작가의 대사는 정말 지독할 만큼 디테일하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못할 말 없이 속에 있는 소리를 다 해버린다. 듣고 있다 보면 너무 사소한 일을 가지고들 죽을 둥 살 둥 싸워대니까 좀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짜증나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속이 시원한 경우가 많다. 아,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말들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며 살아간다. 누구나 입으로는 "솔직한 게 좋아" 라고 말하면서 정작 솔직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운해도, 아무리 아파도 꾹꾹 눌러 참으며 오늘도 말 한 마디 못 하고 하루를 지냈노라고... 그렇게 홀로 서글픔에 잠겼던 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임성한 작가는 우리 마음속의 그런 서글픔과 답답함을 약간이나마 풀어준다. 드라마 속에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말이 되건 안 되건, 소리소리 질러가며 속사포처럼 속엣말을 다 쏟아내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이성이 작동하여 "저게 말이 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눌렸던 감정이 작용하여 등장인물에게 공감하게 되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언제나 파격적인 소재와 진행으로 막장 논란에 시달리면서도 시청률 면에 있어 실패해 본 적 없는 작가 임성한의 독특한 힘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나는 솔직히 오늘 밤에도 임성한 작가의 그 독한 대사들을, 그 지독한 디테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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