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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상회' 이 끝간 데 모를 먹먹함의 정체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장수상회' 이 끝간 데 모를 먹먹함의 정체

빛무리~ 2015. 4. 10.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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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내게는 박근형과 윤여정의 이름만으로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영화였다. 원래부터 무척 좋아하는 배우들이기도 했지만 특히 최근 나영석 PD의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를 통해 새롭고 인간적인 매력까지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명품 연기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기회를 어찌 마다할소냐! 더욱이 여타 작품들에서 노인 배우들의 역할이란 젊은 주인공들의 부모나 조부모 자격으로서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데 반해, '장수상회'에서는 그들이 어엿한 멜로의 주인공들로서 2시간 가량의 러닝타임을 꽉 채우게 될 터이니, 개봉 첫날 영화관에 들어설 때부터 마음은 기분좋은 설렘으로 콩닥거리고 있었다. 



'장수상회' 관람 후의 느낌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먹먹함'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가슴 한 쪽이 따스하면서도 끝없이 먹먹해지는 그 느낌은 한참 동안이나 지속되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게 힘들어서 얼른 떨쳐내려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몇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생각을 떠올려 보면 조금도 변색되지 않은 먹먹함이 다시 생생한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특히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비치는 성당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성칠(박근형)과 금님(윤여정)의 다정한 모습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속에 이 먹먹함을 다시 불러올 것만 같다. 


70대 나이에도 해병대 출신의 꼿꼿한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노신사 김성칠은 남자 중의 상남자로서, 평생 여자라고는 한 번도 가까이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인물이다. 이토록 거칠고 퉁명스럽고 성질 고약한 노인네라니! 게다가 황소 고집은 어찌나 대단한지, 온 동네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재개발을 이 노인네 한 명이 죽자고 반대하는 바람에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마침 성칠씨네 앞집으로 꽃처럼 가냘픈 자태의 금님씨가 이사를 온다. 이혼한 딸과 어린 외손녀와 함께 살고 있는 금님씨의 성은 바로 '임'이니, 그녀의 이름은 고귀한 '임금님'이다. 



금님씨는 재개발을 염원하는 마을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칠씨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며 '미인계'를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너무 쉽지 않은가? 고작 두 번 정도 예쁘게 웃어주며 대쉬했을 뿐인데, 그 까칠한 김성칠 할아버지가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어하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의 목적은 순수하지 못했을망정, 그런 성칠씨의 순박한 모습을 바라보는 금님씨의 눈빛도 날마다 더욱 따스해지니 필시 이것은 진심인 게다. 금님씨는 한없이 서툴고 투박한 성칠씨를 자상하게 이끌어주며, 그녀의 부드러움에 감화된 성칠씨는 차츰 세상을 향해 뾰족히 곤두세웠던 가시를 거두어간다.



 

비가 오시던 날 길가에 피어있는 작은 꽃을 발견한 금님씨가 몹시 반가워하며 "막핀꽃이네!" 라고 외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막핀꽃 아세요? 봄에 피었던 꽃이 가을에 다시 피는 거예요. 생애 마지막 꽃을 피우는 거죠!"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꽃을 내려다보며 금님씨가 말했다. 성칠씨도 몸을 낮추어 그 조그마한 막핀꽃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 머릿속에는 생전 처음 듣는 '막핀꽃'이라는 단어가 깊이 새겨졌다. 겨울을 코앞에 둔 가을의 어느 날, 봄에 피었던 개나리가 다시 노랗게 피어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쨌든 그들의 사랑은 잘 되기만 하면 그 누구도 손해볼 것 없는 완벽한 윈윈게임이다. 성칠씨와 금님씨는 외롭지 않게 짝을 찾아 인생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성칠씨가 순순히 인감을 내어주기만 한다면 재개발을 고대하던 마을 사람들의 소망도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이리하여 온 마을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두 노인의 사랑을 응원하는데, 특히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인물은 바로 성칠씨가 근무하고 있는 '장수마트'의 사장인 김장수(조진웅)다. 김장수에게 연애코치를 받으며 금님씨와의 데이트를 순조롭게 이어가는 성칠씨는 달콤한 사랑의 기쁨에 나날이 젖어드는데... 



후반부의 반전이 매우 중요한 영화이니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하려 한다.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늙고 병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에서 비롯된 인간 본연의 고뇌인 것 같다. 서리가 내린 듯 눈부신 백발의 성칠씨도 오래 전 어느 날에는 푸른 야생마처럼 들판을 내달리던 소년이었고, 얼굴 가득 고운 주름이 잔잔히 새겨진 금님씨도 그 무렵에는 단정한 갈래머리 늘어뜨린 채 소년의 고백에 홍당무가 되던 소녀였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그 찬란한 봄날은 어느 덧 머나먼 기억 속에 묻혀져가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막핀꽃처럼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일 뿐임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비록 누군가는 꽃길을, 누군가는 풀밭을, 누군가는 가시덤불을 지나고 있지만 어차피 목적지는 모두 똑같다. 종착역에서는 그 누구도 생노병사의 관문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풋풋한 청춘이라 성칠씨와 금님씨의 감정에 몰입하기 어렵다면, 엄마의 마지막 사랑을 눈물겹게 지켜보는 딸 민정(한지민)의 감정에 몰입해 보는 것도 괜찮은 감상 방법일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생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게 될까? 막핀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순간을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고민에 빠지기보다는, 지금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손을 한 번 꼭 잡아보는 것이 더 좋을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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