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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운 딸 하나' 윤유선, 편견의 철옹성 무너뜨릴까? 본문

종영 드라마 리뷰 /잘 키운 딸 하나

'잘 키운 딸 하나' 윤유선, 편견의 철옹성 무너뜨릴까?

빛무리~ 2013. 12. 3. 07:30

 

예고편만 보았을 때는 기본 설정 자체가 너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에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가업을 잇기 위해서 꼭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집안이라니 그 발상부터가 믿기 어려울 만큼 고루하고 어리석은데,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장여자라는 주인공의 정체성 또한 그 한심스런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 키운 딸 하나' 라니 제목은 또 왜 그리 촌스러운지! 지나치게 높은 출산율이 사회 문제가 되었던 1970년대에는 산아제한을 권장하는 표어가 유행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지라 표어의 내용도 모두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처음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였다가, 여전히 인구조절이 잘 되지 않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로 바뀌었다. 집집마다 1~2명의 자녀만을 낳도록 강권하며, 그 설득 수단으로 딸의 위상을 높여주는 내용이었다.

 

  

30~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의 세상은 그 당시 표어가 외치던 그대로 변화했다. 대부분의 가정이 1~2명의 자녀만을 기르고 있으며, 더 이상 딸의 존재가 아들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받지도 않는다. 1~2명의 자녀조차 양육하기 벅찬 시대가 되어 지나친 출산율 저하가 사회문제로 떠올랐으니 그런 점에서는 바람직한 변화라고 하기 어렵지만, 억압받던 여성의 위상이 남성과 어느 정도나마 동등해진 것은 사회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케케묵은 70년대의 표어를 인용하여 드라마의 제목을 짓다니, 나는 좀처럼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내용도 제목 만큼이나 촌스러울 것 같아서 별로 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 수개월 동안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던 '못난이 주의보'를 떠나보낸 마음의 허전함이 너무 컸던 탓일까? 별 기대 없으면서도 나는 어느 새 그 쪽으로 채널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생각보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선입견을 무너뜨린 것은 대본이나 연출의 힘이라기보다, 연기자 윤유선의 내공이었다. 윤유선이 맡은 역할은 국내 최고의 간장 기업인 '황소간장'을 가업으로 이어 온 장씨 집안의 며느리 주효선이다. 1613년 조선 광해군 시절부터 대령숙수는 장씨 집안에서 배출되었고, 조선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방식으로 메주를 사용해 장을 담그는 우리 민족만의 장 문화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장씨 문중의 대령숙수들이 이룬 성과였다고 한다. 이후 대령숙수직은 400년 동안이나 장씨 문중의 가업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지금의 '황소간장'이다. 이쯤 되면 장씨 가문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어리석게도 시대의 변화와 순리에 따르지 못하고 조상의 고귀한 유산을 오직 남자들만의 것으로 고집해 온 덕분에 지금은 가업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황소간장'의 현임 대표인 장판로(박인환)에게는 외아들 장교수(이영범)가 있으나, 장교수는 어려서 무슨 병을 앓았던 탓인지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신체적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장교수는 가업을 승계할 수 없었고 장판로는 오매불망 손자를 기다렸다. 400년 전통의 '황소간장'을 이어받을 권리와 책임은 오직 손자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교수의 아내이자 장판로의 며느리인 주효선은 딸만 줄줄이 셋을 낳았을 뿐 좀처럼 아들을 낳지 못했고, 시아버지의 은근한 재촉과 타박은 갈수록 심해졌다. 장씨 집안의 여성 차별은 완강하고 지독했다. '황소간장'의 장고에서 간장이 익어가는 동안, 여자는 부정탄다는 이유로 그 장소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부득이하게 출입할 경우는 최대한 얼굴을 가려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해야 했다. 세 명이나 되는 장판로의 손녀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주효선은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는데, 배운 집 자식이라 하여 부잣집 황소간장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친정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배울만큼 배운 여성으로서 자기 딸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교육(여자가 들어가면 부정탄다는 둥)과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불복할 법도 하건만, 주효선은 순한 자세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절대 연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시아버지의 옹고집 앞에 기꺼이 엎드리고 있지만, 그녀에게서는 왠지 모를 기백이 느껴졌다. 작고 가녀린 체구에는 대인배의 기풍이 서렸고, 차분하며 담담한 목소리에는 신뢰감이 깃들었다.

 


나는 새삼 윤유선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주효선의 캐릭터에 매료되었다. 이런 엄마가 있는 한 자식들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며, 그녀의 조용한 기백은 장판로의 비뚤어진 옹고집도 언젠가 무너뜨리고 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장판로의 고집 덕분에 명맥이 끊길 뻔했던 가업 '황소간장'도 결국은 아들을 낳지 못한 이 며느리의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표면상의 주인공은 남장소녀 장하나(박한별)이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엄마 주효선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매혹적인 엄마의 강인한 모습을 쭉 지켜보고 싶어졌다. 6살 때 아역 배우로 데뷔한 윤유선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무려 40년의 연기 경력을 지닌 베테랑이다. 평범한 조연처럼 보이다가도 이렇게 그 내공의 깊이가 슬쩍 비춰질 때면, 나는 가끔씩 소름이 끼치곤 한다.

 

넷째 아이를 임신한 주효선은 태아가 아들일 거라는 의사의 말에 남편 장교수와 함께 기뻐하지만, 불행히도 그 아이는 사산되고 주효선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하나는 분명 주효선의 넷째 딸로 소개되어 있으니, 아마도 친딸이 아니라 입양아일 것이다. 그러잖아도 딸이 많은데 무슨 사정으로 또 한 명의 딸을 입양하게 되었는지는 차후의 전개를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주효선과 장하나가 손잡고 무너뜨려야 할 세상의 편견은 두 가지로 늘어났다. 첫째는 남성우월주의이고, 둘째는 혈연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이다. 장하나가 아들이 아닌 딸로서, 그것도 친딸이 아닌 양딸로서 '황소간장'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면, 이 두 가지 견고한 편견의 철옹성은 무너지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저 두 가지 편견은 참으로 오랫동안 이 세상을 강력한 힘으로 지배해 왔다. 아직도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입양아라고 놀려대는 현상은 뿌리뽑히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촌스럽다고 여겼던 이 드라마의 주제는 뜻밖에도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앞으로 장교수의 후처가 될 임청란(이혜숙)과 그 어머니 변종순(김지영)의 캐릭터는 어딘지 막장의 분위기를 솔솔 풍기고 있는데, 활용을 잘 한다면 감칠맛 나는 조연들로 극의 재미를 더할 듯 싶다.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를 보면 임청란은 시부 장판로가 고대하던 아들까지 낳는 모양인데, 그 불리한 상황에서 장하나는 어떻게 승리의 깃발을 움켜쥘 수 있을까? 차후의 전개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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