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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배수빈, 악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비밀' 배수빈, 악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빛무리~ 2013. 10. 25.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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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에 이르러 중대한 비밀의 일부가 명백히 밝혀졌다. 거의 확신에 가깝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끔찍한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르니 가슴에 느껴지는 먹먹함의 정도는 이전과 비할 수가 없었다. 어린 산이의 존재를 이용해서 강유정(황정음)의 가석방을 막은 사람... 치매에 걸린 유정의 아버지(강남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 그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이 두 가지 죄악을 저지른 사람은 역시 안도훈(배수빈)이었다. 강유정은 안도훈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안도훈은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서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강유정은 안도훈의 뺑소니 범죄를 대신 덮어쓰고 옥살이를 함으로써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수없이 입었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안도훈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모든 아픔을 자신의 운명이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스스로 이별을 결심했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천하에 쓸쓸한 외톨이가 되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한 여자는 이렇게 자신의 온 존재를 불태워 한 남자를 사랑했고, 사랑한 만큼이나 그 남자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참히 깨져 버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비밀 중 한 가지는 서지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다. 폭풍우 치던 그 날 밤의 뺑소니 사고는 몹시 미스테리하여, 서지희를 치어 죽인 사람이 정확히 안도훈인지조차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조민혁(지성)이 가난한 집의 평범한 여자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회장(이덕화)이 사주하여 의도적으로 서지희를 죽였고, 안도훈이 몰던 차는 그 직후에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거라는 추측이 지금까지는 유력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안도훈과 강유정의 아들 산이가 정말 죽었는지의 여부다. 이 드라마는 거의 대부분 강유정의 시점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시청자는 강유정과 마찬가지로 산이의 죽음과 장례 치르는 장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저 '죽었다'는 말 한 마디만 전해졌을 뿐인데, 믿을 수 있을까?

 

 

혹시 안도훈이 산이를 어딘가에 숨겨 두거나 입양을 보내 놓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제 핏줄인데, 비록 조민혁의 꼬임에 넘어가 유정의 가석방은 막았더라도 산이만은 안전하게 보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이의 존재는 자기 앞날에 짐이 될 테니까, 진짜 출세하려면 신세연(이다희) 같은 상류층 여자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니까, 유정은 물론 자기 부모에게조차 산이가 죽었다고 속인 채 혼자만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 6회 동안 밝혀져야 할 비밀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그 중 산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유일한 기쁨과 희망의 빛이다. 그 외의 비밀은 모두 지독히 슬프고 끔찍한 진실들이니까.

 

솔직히 나는 이 드라마에 쏟아지는 호평들과 높은 시청률에 썩 공감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구태의연한 신파 스토리를 제법 신선하게 풀어나가는 측면은 있지만, 시청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밀의 정체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스릴이나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다.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지만, 극 중 캐릭터를 살펴보면 그닥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없다. 강유정의 대책없는 희생과 선량함은 속터질 만큼 답답하고 청승맞아 보이며, 조민혁의 까칠하면서도 열정적인 매력이 후반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지만 역시 내 눈에는 임팩트가 약하다. 사랑하는 여자와 뱃속의 아이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고 해서 자기 인생의 목표를 가해자에 대한 복수로 정해 놓고 살아가는 놈이라니, 심하게 못나고 속 좁고 어리석지 않은가?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필요한 설정이긴 했다. 결과적으로는 조민혁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바람에 영영 감춰질 뻔했던 진실이 드러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별로 멋진 녀석이 못 된다.

 

그런데 안도훈의 캐릭터는 지금까지 보았던 악역들과의 차별성이 보이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극장' 류의 수사물을 제외한다면, 악역이 극 중반을 넘어 후반에 접어들도록 악역 아닌 척 하고 시치미를 떼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보통은 초반이나 늦어도 중반쯤에 악역의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수빈을 명품 악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던 드라마 '49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듬직한 약혼자의 모습으로 여주인공의 병상을 지키던 배수빈의 천사같은 가면이 벗겨지고 시커먼 악마의 얼굴이 나타난 것은, 총 20부작 중에서 불과 3회를 넘지 못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비밀'은 총 16부작의 짧은 분량이건만 무려 10회를 넘기도록 악역의 정체를 보일 듯 말 듯 숨기고 있었으니 나름 대단한 능력이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안도훈이 강유정의 희생을 거부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때부터, 자기가 운전했노라고 자수하지는 않으면서 강유정에게 너 왜 이러느냐고 버럭질만 할 때부터, 그리고 검사가 되어 그녀에게 징역 5년을 구형할 때부터 그 놈이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시청자가 나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사람이니까 그런 처지가 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의 행동이기 때문에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했다. 봉사활동을 핑계삼아 강유정이 복역하는 교도소에 꾸준히 드나드는 모습이며, 출소 후 산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유정이 미친듯이 통곡할 때 그녀를 품에 안고 서럽게 함께 울던 모습 등, 진실해 보이는 몇 가지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안도훈의 감정선에도 적잖이 공감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고도의 연기에 불과했다. 누명을 덮어쓰겠다는 강유정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을 때부터 안도훈의 배신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선택한 일이니 책임도 그녀의 몫이라 여겼고, 별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태어난 아이도 그녀와 함께 달갑잖은 짐덩어리였을 터, 혹시라도 아이 때문에 발목 잡힐까 의도적으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복수심을 불태우는 조민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강유정의 가석방을 막고 싶었던 사람은 안도훈이 아니었을까? 목에 걸린 커다란 생선가시처럼, 가슴 안쪽의 커다란 돌 덩어리처럼, 그녀는 그에게 더없이 껄끄럽고 무겁고 불편한 존재였으니까.

 

 

급기야 안도훈은 사건의 진실을 알아챈 듯한 강유정의 아버지를 빗속에 끌고 나가 죽도록 방치했다. 혹시 누가 일찍 발견해서 신고할까봐 신분증 팔찌까지 빼앗아 갖고 있다가 유정에게 발각될 듯 싶으니까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일련의 행동들이 섬뜩하도록 태연하고 용의주도하다. 만약 조민혁이 아니었다면, 강유정은 이 모든 사실을 모른 채 죽을 때까지 안도훈을 사랑했던 기억만 품고 살아갔을 것이다. 운명이 얄궂어서 슬프게 헤어졌지만, 그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노라 믿으면서 말이다. 과연 진실을 알게 된 것이 좋은 일일까? 그녀에겐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오랫동안 숨기고 있다가 드러낸 발톱은 그만큼 더 날카롭고 예리했다. 진실이 숨겨졌던 시간 만큼, 어떻게든 그를 믿고 싶어하며 보내 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비로소 드러난 그의 얼굴은 더욱 섬뜩하고 잔인하고 무서웠다. 이미 수많은 캐릭터가 쏟아져 나와 브라운관에 신선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지금, 이만하면 악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얼굴을 가진 악마 안도훈의 캐릭터는 이 작품 '비밀'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유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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