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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

'굿 닥터' 주상욱, 박제된 드라마 속 살아있는 캐릭터

빛무리~ 2013. 8. 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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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닥터' 1~2회는 무척이나 신선했습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의사...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아주 강렬하게 시선을 끌었죠.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누구보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소아외과 의사라니, 마치 꿈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듯한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은 단숨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게다가 서번트 증후군으로 인한 천재적 암기력과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는 판단력도 매력적이었고요. 박시온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참 많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주원의 명품 연기도 감탄을 자아냈죠. 하지만 신선함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3회 이후로 '굿 닥터'는 급격히 밋밋해지면서 초반의 흡입력을 잃고 말았어요.

 

 

일단은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와 전체적인 갈등 구조가 매우 단선적이고 구태의연합니다. 선(善)에 해당하는 최우석(천호진) 원장과 여주인공 차윤서(문채원)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박시온을 지켜주지만, 부원장 강현태(곽도원)와 과장 고충만(조희봉)을 비롯한 악(惡)의 세력들은 병원 재단이니 운영권이니 개인적 출세니 하는 문제들로 골몰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박시온을 이용해 최우석 원장을 내치려는 음모를 꾸미는 중이죠. 최근에는 미스터리의 인물 김창완까지 가세하여 어른들 사회의 추악함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데요. 악의 무리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지고 선을 지키려는 세력은 미약하기만 한데, 그 중심에 있는 박시온은 '오직 환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환자보다 다른 문제를 우선시하는 의사들의 모습과 그 틈에 끼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필연적 연약함은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아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박시온이라는 주인공은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와 연극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지극히 아름답고 독특한 매력을 지녔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몰입이 안 되는 거였죠.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 표현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자폐증 환자의 특성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주원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지만, 박시온을 보면 인간의 희노애락이 잘 느껴지지 않아요. 기쁜지 슬픈지 화가 났는지 고민하는지... 물론 자폐증 환자라고 해서 어찌 마음 속 희노애락이 없을까마는,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발산하지 못하니 보는 사람마저 답답할 지경입니다. (연기하고 있는 주원은 오죽할까요..;;)

 

 

문득 떠오르는 것은 미국의 영화 '레인맨' 인데요. 이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는 자폐증 환자인 형 레이몬드(더스틴 호프만)지만, 사실상 주인공은 동생인 찰리(톰 크루즈)입니다. 관객들은 찰리의 입장에 몰입하여 레이몬드를 바라보게 되는 거죠. 형을 통해서 느끼는 찰리의 고뇌와 기쁨과 애정과 슬픔 등의 감정선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감동을 받고 힐링이 되는 명작입니다. 그런데 '굿 닥터'를 보면 레이몬드의 역할은 박시온이 충분히 감당하고 있지만, 찰리의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마땅치 않군요. 최우석과 차윤서가 곁에 있지만 그들의 단선적인 캐릭터로는 부족합니다. 시청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톰 크루즈의 찰리처럼 적당한 속물 근성과 탐욕을 지닌 평범한 인물이 필요한데, 마치 태어날 때부터 성자였다는 듯 너무 선량하고 정의로운 최우석과 차윤서는 그저 박시온을 감싸고 편들어 주는 것밖에 딱히 할 일이 없어요.

 

현재 주인공 박시온은 작품 속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혼자 동동 떠 있는 느낌이고, 그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선과 악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군요. 박시온 외에는 개인적 스토리를 지닌 인물도 거의 없고... 여러모로 밋밋하고 지루합니다. 각 회마다 어린 환자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에피소드를 꾸미고는 있는데, 모두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식상할 뿐 새로운 감동을 주지는 못하네요. 5~6회에서는 급기야 늑대 소녀까지 등장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생뚱맞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니 아무래도 무리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박시온의 헤어졌던 엄마(윤유선)는 왜 갑자기 식당 아줌마가 되어 나타나는지... 이건 클리셰의 집합인가요.

 

 

그런데 김도한(주상욱)의 숨겨진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완벽한 의사 김도한이 유독 박시온에게만 차갑게 구는 이유를 그 동안은 알 수 없었죠. 모두가 무시하는 박시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만 보아도 김도한은 매우 공정하고 편견이 없는 사람인데, 자신의 안위보다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만 보아도 매우 선하고 올바른 사람인데, 평소 박시온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일말의 배려심이나 온기를 느낄 수 없으니 이상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암시는 계속 주어졌는데, 드디어 6회에서 그 비밀의 내용이 밝혀졌군요.

 

김도한에게는 박시온과 비슷한 정신 장애를 앓던 동생 김수한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수한이는 어느 정도 평범한 생활이 가능해졌는데, 동생의 나이가 16세 정도쯤 되었던 어느 날 김도한은 부모님에게 획기적인 제안을 했죠. 매일 아침 저녁마다 학교에 데리고 다니지 말고 수한이가 혼자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김도한은 당시 의대 초년생이었던 듯한데, 이제는 동생이 혼자서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에요. 분명히 동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결과는 비극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혼자 다니는 데 익숙치 않았던 수한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공포에 질려 우물쭈물 하다가 사람들과 함께 건너지 못했고, 뒤늦게 귀를 틀어막고 달렸으나 빨간불로 바뀐 것을 못 보았던 탓에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는 죄책감은 김도한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냥 안전한 보호막 속에서 살도록 했더라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김도한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죠. 그러다가 박시온을 만났고, 그에게서 죽은 동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이토록 험하고 약한 자를 물어뜯으려는 맹수의 이빨이 도처에서 노리고 있는데, 자신을 방어할 능력조차 없는 박시온이 겁 없이 뛰어들어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김도한의 해묵은 상처를 들쑤시고 말았군요. 겉으로는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최우석 원장이 박시온 때문에 어려운 입장에 처하는 것이 싫어서라고 했지만, 의사를 그만두라고 몰아붙인 이유는 사실 전적으로 박시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린 녀석이 세상에 홀로 발을 딛으면, 온통 상처받을 일 투성이에 치명적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수한이에게는 최선이었어..."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김도한의 모습에서는 슬픔이 묻어났습니다. 의사로서 너무나 완벽한 모습이 조금은 기계적으로 느껴졌는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비이성적 판단을 내리니 오히려 따스함이 전해지는 듯했어요. 그의 동생은 단지 불운했을 뿐 (또는 타고난 운명이었을 뿐) 자폐증 환자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겠죠. 비록 위험하고 어렵더라도 사회 적응을 위해 노력하며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맞을 겁니다. 김도한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허무하게 죽어간 동생의 기억 때문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었나봐요.

 

 

비록 간단한 스토리였지만, 이처럼 개인적 과거가 설정됨으로써 김도한은 확연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났습니다. 솔직히 다른 캐릭터들은 저마다 선한 인물의 표본, 악한 인물의 표본, 이런 식으로 박제된 것처럼 보일 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저는 '신의 퀴즈'를 안 보았기 때문에 박재범 작가의 드라마를 이번에 처음으로 접하는데요. 독특한 주인공 설정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다양한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살리는 데는 미숙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토리를 이끄는 흡입력도 아직은 약해 보이고요.

 

어쨌든 앞으로는 김도한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으니,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몰입도가 높아질 듯 싶습니다. 이 작품의 키포인트는 박시온을 통해서 변화되는 타인들의 모습이거든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굿 닥터'로 성장해가는 박시온의 모습을 보면, 김도한의 가슴에 새겨진 깊은 상처도 어느 덧 아물어 가겠지요. 그것을 통해 우리 마음도 함께 치유된다면, 약간 부족하나마 '굿 닥터'는 힐링드라마로 탄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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