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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못된 계순이를 위한 변명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각시탈

'각시탈' 못된 계순이를 위한 변명

빛무리~ 2012. 8. 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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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히어로물일거라 생각했던 '각시탈'은 점점 더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며,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느 새 잊혀져 버렸던 애국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촬영 초기에 있었던 보조출연자 사망 사고에 대한 뒷수습이 말끔하게 처리되지 못한 것과, 중간 부분에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욱일승천기를 등장시키며 여배우로 하여금 기미가요를 완창하게 했던 회차를 계기로 "오히려 친일드라마가 아니냐?"는 논란을 낳았던 것 등, 몇 가지 만만찮은 잡음이 있었던 탓에 이 작품이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선뜻 자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드라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더구나 우연인지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방송 시기가 올림픽 기간과 맞물리면서 그 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생각과 느낌은 다른 법이지요. 제가 원래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편이기는 해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기간에는 남들 못지 않게 TV 앞에 붙어 앉아 열렬히 "대~한민국!"을 응원하곤 했던 국민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어찌된 셈인지 올림픽 내내 별로 관심이 안 끌리더군요. 물론 요즈음 개인적으로 다른 일에 잔뜩 정신이 팔려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그 이유 때문에 최근엔 블로그도 거의 방치해 두고 있었다죠. 독자님들께 늘 죄송하다는..;;), 오랫동안 천천히 제 안에 쌓여온 기억들의 영향으로, 생각의 방향과 우선순위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드라마 '각시탈'을 보는 저의 시각 또한 남들과는 좀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분명 주제를 이끄는 인물들은 각시탈 이강토(주원)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인데, 제 시선을 끌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은 항상 따로 있었거든요. 자기를 고문하는 기무라 슌지(박기웅)를 끝내 비웃으며 장렬하게 죽어간 여성 독립운동가 적파(반민정)의 최후를 보았을 때나, 심지어 올림픽 권투챔피언이 거리 행진 중에 용감하게 일장기를 떼어 내던지는 통쾌한 장면을 보았을 때도 "참 멋있구나" 생각은 했지만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고 느낀 부분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조선 처녀 심순이(가원)가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모른 채 위안부로 끌려가던 장면이었어요.

 

 

여학교에서 늘 우등을 차지할 만큼 공부도 잘했고 훗날 의사가 되겠다는 당찬 꿈을 지닌 소녀 순이가 기꺼이 정신대 호송 트럭에 올라탄 이유는 할머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간호부로 지원해서 가면 큰 액수의 월급도 줄 뿐 아니라,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았던 거죠. 가난한 살림에 할머니가 남의 집 일을 해서 벌어주는 돈을 학비삼아 편안히 공부만 하기엔 너무 착했으니까요.

 

천금같은 손녀를 전쟁터로 보내는 게 못내 불안한 할머니는 극구 만류했지만, 순이는 의사가 되기 위한 실습 삼아서라도 간호부 일을 해보고 싶다며 씩씩하게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은 어쩔 수 없는 듯, 트럭을 쫓아오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순이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는데...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죠. 그 천진난만한 소녀를 기다리는 운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소중한 할머니를 위해 고된 삶을 자청했던 순이의 고운 꿈은 그토록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네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 장면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독립투사들의 장렬한 죽음보다 더 슬펐습니다. 요즘 제 마음의 우선순위는 확실히 '국가'보다는 '가족'에 치우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채홍주(우에노 리에, 한채아)가 한 번도 미웠던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이 있으면서 독립자금을 후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독립군에게 죽임을 당했죠.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죽고, 채홍주는 9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이라면 조선에 대한 애국심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독립군을 원수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싶었고, 일본인을 아비로 삼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다만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갈 그녀의 운명이 너무 가여울 뿐이었죠. 이강토를 향한 서글픈 짝사랑은 벌써 올가미가 되어 그녀 자신의 목을 시시각각 조여오고 있습니다.

 

 

제가 극 초반 이강토의 캐릭터에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도 친일행각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고 달리 할 줄 아는 일도 없는 처지에, 일본 순사가 되어서라도 돈을 벌어 어머니와 형을 부양하려 했던 그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조선 동포들을 학대하는 모습은 오버스럽다 싶었고,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어머니와 형을 불행하게 만드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악질 순사가 되어 독하게 일해야 승진도 빨리 하고 월급도 많이 받을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날마다 가슴치며 괴로워하는데... 자기가 조선인들을 두들겨 팰 때면 바보가 되어버린 형조차 팔에 매달려 "강토야, 그러지 마!" 하면서 눈물로 애원하는데... 그렇게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돈만 벌어다 주면 뭐합니까? 이강토의 선택은 가족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가족을 괴롭히는 것이었기에, 저는 그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의 친일행각을 가족이 편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었다면 이강토의 초반 캐릭터에는 더 설득력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드라마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겠죠. 

 

 

친일파 이시용(안석환) 백작의 아들 이해석(최대훈)의 죽음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 것도 아버지를 향한 그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부끄러웠지만...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나약한 청년... 하지만 저는 열렬한 애국심과 특출한 용기를 지닌 영웅이 아니라서 그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남녀 주인공을 비롯해서 조연에 단역들까지 모두 매섭고 독하고 강한 사람들인데, 그 와중에 이렇게 약한 캐릭터는 처음 보는 듯 싶더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현실 속에는 오히려 이해석과 같은 인물이 대부분 아닐까요? 그는 특별히 나약한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운이 나빠서 너무 독한 시대에 태어났을 뿐이죠. 사실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부친 이시용의 그늘 아래 편안히 살고 싶은 욕구를 결연히 뿌리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이해석의 마지막 선택은 오히려 평범을 벗어던진 용기였기에 차마 탓할 수도 없더군요.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함계순(서윤아)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순이는 변명할 여지없는 '나쁜 년'으로만 묘사되어 왔었죠. 그저 기무라 슌지가 던져주는 몇 푼의 돈에 눈이 멀어 서커스단의 동료들을 촘촘히 감시하며, 수상한 모습이 보일 때마다 옳타꾸나 하고 쪼르르 달려가 밀고하는 그녀의 행위는 누구라도 치를 떨만큼 역겨웠으니까요. 특히 여주인공 오목단(진세연)을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얄미워 보일 수밖에 없는 악녀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계순에게도 남모를 이유와 아픔이 있었으니...

 

슌지에게 불려간 계순은 최근에 목단과 이강토가 자주 만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그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발동한 양심과 죄책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슌지를 믿으면 위험하다는 목단의 충고에 두려움이 생겨서 마음이 흔들린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계순의 어설픈 거짓말은 곧바로 들통났고, 기무라 슌지의 광기어린 물고문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찾아갔던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습니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 있는데, 악질 순사의 대표주자인 고이소가 다가와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희롱까지 하는군요. 넋이 나간 채 서커스단으로 돌아온 계순을 보며 오목단이 염려스런 눈빛으로 이유를 묻자, 이제껏 줄곧 '못된 년'이기만 했던 함계순은 그제야 흐느끼며 속엣말을 털어놓습니다.

 

 

"너도 알지? 나한테 딸린 식구가 아홉인 거, 너도 알지? 나... 그냥 순전히 돈 때문에 시작했어. 돈이 되니까, 돈이 생기니까... 그런데 이젠 너무 무서워. 잘못되면 나까지 죽을 거 같아. 내가 죽어버리면 우리 식구들은 어떡하지?" 고작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가냘픈 두 어깨에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식구의 밥줄이 달려있게 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계순이가 처한 현실은 그토록 삭막한 것이었네요. 서커스 단원이라는 직업 자체도 언제 심각한 부상을 당할지 모르는 험한 일인데,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 봤자 그 월급으로 아홉 개의 입을 감당하기는 버거웠겠죠. 눈만 뜨면 대가족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계순의 입장에서, 애국심이나 죄책감은 그 다음 문제였을 겁니다.

 

계순이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긍심마저 버린 이유는 바로 가족이었던 거죠.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마저 사치로 여길 만큼 생존 자체가 벅찼던 그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멘탈이 완전히 붕괴된 채 바들바들 떨며 울고 있는 계순의 모습은 놀랍게도 위안부로 끌려간 순이와 꼭 닮아 있더군요. 물론 수차례에 걸쳐 큰 잘못을 저지른 계순이와 아무 죄 없는 순이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변명의 여지없이 나쁜 년일지언정, 아홉 명 가족에게는 하루하루의 목숨줄이었던 소녀... 자기 한 몸을 바쳐서라도 가족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의 본질만은 순이와 다름없지 않을까요?

 

 

사실 예전에도 계순이의 사정이 잠깐 언급된 적은 있었습니다. 급히 독립자금을 마련해야 하니 봉급 날짜를 미루면 어떻겠냐고 단원들의 의견을 묻는 조단장(손병호)에게 까칠하게 대들며, 자기는 딸린 식구가 많아서 절대 찬성 못하겠다고 하는 장면이었죠. 그 때는 워낙 얄밉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보니 그녀의 입장을 헤아릴 수가 없었네요.

 

하지만 이제 토사구팽 당할 처지에 놓인 계순이의 처연한 눈물을 보는 순간, 저는 한 번이라도 그녀를 대신해서 변명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죄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겠지만, 그녀한테는 그렇게 해서라도 꼭 지켜야만 했던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노라고... 이 정도의 빈약한 말로 변명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한 마디만은 해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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