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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엄기준, 상처입은 순수청년 악마가 되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유령' 엄기준, 상처입은 순수청년 악마가 되다

빛무리~ 2012. 7. 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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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11~12회에서는 이 드라마의 절대악이며 모든 범죄의 배후조종자인 조현민(엄기준)의 과거가 드러났습니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의 절대악이었던 강서연(황선희)은 선천적 사이코패스에 가까워 사람을 죽이는 데에 타당한 이유가 없었지만, 조현민은 전혀 다르게 설정되었군요. 물론 지극히 냉혹하며 무차별적이라는 면에서는 강서연과 별 차이가 없고, 그 스케일에 있어서는 강서연을 능가하는 수준이므로 사회에 전체적으로 끼치는 해악은 조현민이 훨씬 크다 하겠지만, 그를 희대의 악마로 만들어 버렸던 13년 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니, 저는 조현민을 탓하기에 앞서 이 썩은 사회와 인간의 추악함에 치를 떨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9년, 세상은 한 건의 빅뉴스로 떠들썩해졌으니, 바로 세강그룹 회장 조경문이 무려 천억원에 달하는 불법 대선자금을 전임 대통령에게 건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뜨린 루머에 조경문 회장은 단호히 대처할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조회장의 심복이었던 남상원은 조회장의 아들 조현민을 유혹했습니다.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혐의를 모두 시인하면 고생을 덜 하고 쉽게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 회장님은 건강도 안 좋으신데 무의미한 싸움으로 오랫동안 고초를 겪으시게 할 수 없다는 남상원의 유혹을 조현민은 덥석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리 남상원과 한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더라도, 그처럼 심각한 사안을 별 고민도 없이 남상원의 말에 따라 결정했다는 게 좀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그 당시 조현민의 마음이 얼마나 아이처럼 순수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조현민은 남상원의 뜻에 따라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얼마 후에 있을 자기 생일에 아버지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니 그 전까지 나오셔야 한다면서 활짝 웃는 아들의 모습에, 조회장은 순순히 그 뜻을 받아들여 모든 혐의를 시인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남상원은 법정에서 조회장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그가 직접 대선자금을 건네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며 거짓 증언을 했고, 그들 무리와 한통속이었던 경찰청 특수수사과 과장 김석준(정동환) 역시 조경문의 모든 범죄가 확실히 입증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믿었던 자들의 배신으로 조회장은 헤어날 수 없는 범죄자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던 거죠. 그의 손목에서 채워진 은빛 수갑의 차가운 광택.

 

조경문 회장은 매우 성품이 올곧고 선량했으나 심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쩌다 세강그룹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회장이 되었을 뿐, 대기업을 이끌기에는 걸맞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청년 시절의 조현민 또한 그런 아버지를 빼닮아 순진하고 욕심없이 삶의 여유를 즐기는 타입이었던 것 같군요. 보석으로 풀려난 조회장은 집에서 맥없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또 혼자 술 드세요?" 밝은 목소리로 다가선 조현민은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아버지 곁에 있겠다면서 조회장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조현민의 결정은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뿐이었지요. "이제 나는 자식의 앞길마저 가로막는 아비가 되었구나!"

 

 

"내가 이 술잔을 왜 마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 한 마디를 남겨둔 채, 조경문 회장은 아들의 눈앞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독이 든 술을 조경문 회장에게 보낸 것은 그의 친동생이자 조현민의 숙부인 조경신(명계남)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도 바로 그였죠.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형이 회장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경신은 계획적으로 형에게 누명을 씌웠고, 남상원과 김석준 등을 매수하여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올가미를 조였습니다. 평소 조경문의 성품을 알고 있던 조경신은, 형이 그토록 엄청난 누명을 쓰고는 견디지 못할 것임도 알고 있었죠. 조경문에게 술을 보내며 "이 술에는 독이 들어 있다. 마시거나 마시지 않거나, 그것은 형의 자유다" 라고 말할 정도로 조경신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경문은 수치심과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군요. 이것이 과연 자살이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죽은 후, 순수청년 조현민은 악마로 변신했습니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따스함조차 그에게는 사치일 뿐이었죠. '싸인'의 강서연이 선천적 사이코패스였다면 '유령'의 조현민은 후천적 사이코패스라 칭해야겠군요. 이제껏 품어왔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를 모두 불살라 없애고, 조현민은 자기 자신을 인위적인 사이코패스로 만들어 버렸던 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 중에 자기 자신이 끼어 있었다는 자책감이었을 겁니다. 남상원에게 속아넘어가 거짓 혐의를 시인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었겠죠. 그 자책의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조현민은 살기 위해서 모든 감정의 씨를 불태웠을 겁니다. 감정이란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 자책감 하나만 따로 떼어내서 없애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숙부 조경신과 그 일당에 대한 복수를 하는데서 그쳤다면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충분했으련만, 조현민은 심약하고 순진했던 만큼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해커팀과 연계하여 한국전력을 공격했던 그의 무모함을 어떤 말로 변명할 수 있겠어요? 마치 세상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초토화시킨 후 그 폐허 위에 군림하려는 미치광이 같습니다. 이제 그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탱크와도 같으니, 그 미친 질주를 멈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 앞을 막아서야 할테고, 필연적으로 그 사람은 숭고한 희생을 치르게 되겠군요. '유령'은 어느 쪽에서 살펴보든 그 엔딩이 매우 비극적일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악마 조현민의 복수는 자기가 당한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주는 것입니다. 일단 조경신의 아들 조재민(이재윤)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검사 임치현(이기영)을 비롯한 검경의 관계자들을 매수하여 올가미를 바짝 조이고 있는데, 추측컨대 다음 차례는 조재민의 자살이 아닐까 싶군요. 조재민의 뻔뻔한 성격상 수치심에 자살을 할 것 같지는 않으나, 그거야 어떻게든 상황을 그렇게 유도하거나 조작하면 될 일이죠. 조현민이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던 것처럼, 조경신도 자기 아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의 예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악마는 조현민이지만, 그 악마를 만든 자는 바로 조경신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착한 형을 죽였고, 그 과정 중에 순진한 조카를 꼬드겨서 이용하는 최고의 악랄함까지 겸비했으니까요. 죄없는 신효정(이솜)을 죽이고, 김우현(소지섭)을 죽이고, 한영석(권해효) 형사를 죽이고, 급기야 수족처럼 자신을 따르던 부하 염재희(정문성)까지 태연하게 살해하는 조현민의 악랄함은 이미 동정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변해버린 그 마음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슬퍼지는 걸까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한 청년을 이런 악마로 만들어 버린 조경신의 추악함이 저는 너무나 밉습니다. 악마보다 더 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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