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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이강토(주원)의 독백 - 나는 한없이 슬퍼진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각시탈

'각시탈' 이강토(주원)의 독백 - 나는 한없이 슬퍼진다

빛무리~ 2012. 6. 2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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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번듯한 집 한 칸이나 마련해 주고, 불쌍한 형을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게 해줄 수만 있으면, 내가 나쁜 놈이라고 욕먹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슌지(박기웅)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운명이란 것도 몰랐다. 내지인이건 반도인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항상 내 편을 들어주는 착한 녀석이니까 평생 친구로 지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나의 출세길을 막는 원수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각시탈이 바로 형이었다. 바보가 되고 폐인이 된 줄만 알았던 나의 형 이강산(신현준)이 바로 각시탈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형에게 총을 쏘았다. 내가 쏜 총에 맞아 피흘리고 죽어가면서도 형은 바보같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자기가 일을 다 마치고 가려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거절도 못하게, 죽지도 못하게, 형은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혼자 남은 나에게 짐을 모두 지워주고 홀가분히 떠났다. 이제 생각하니 형이 나에게 미안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형이 미안해야 맞는 거였다.

 

 

형이 죽은 후, 세상이 달라졌다. 마치 감았던 눈을 뜬 것처럼, 내 눈에 차츰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 거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형이 남기고 간 일들을 대신 마치려는 생각뿐이었다. 키쇼카이 일당을 왜 없애야만 하는지도 나는 몰랐다. 그저 형이 하려던 일이니까 이어받았을 뿐이다. 백건(전현) 숙부도 나에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나 스스로 깨달아야 할 일임을 숙부는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숨겨졌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그것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내가 형을 대신해서 각시탈을 쓰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무라 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가 내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슌지의 형이었기 때문에, 슌지는 각시탈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각시탈을 쓰고 있지 않을 때, 내가 이강토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슌지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줄만 알았던 거다. 슌지에게 쫓기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도 내 마음속에 기무라 슌지는 여전히 하나뿐인 친구였다. 내가 슌지에 대한 우정을 이야기하자, 백건 숙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각시탈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뜻인 줄 알았는데, 사실 숙부는 내 마음에 받을 상처를 염려한 것이었다.

 

 

내가 기무라 타로(천호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은 콘노(김응수) 국장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지만, 슌지는 그 일로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자기 아버지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는 거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는데도, 나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무라 타로는 형이 제거하려 했던 키쇼카이의 일원으로,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없애야 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내 친구 슌지의 아버지였다. 아, 이것이었구나! 모진 운명을 비로소 깨닫고, 나는 슌지에게 말했다.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너와 난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는지도 모르지. 만약 내가 네 아버지 목에 칼을 겨누는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마라!" 이 진심어린 경고 한 마디는 오랜 우정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어째서 나는 어머니와 형을 잃은 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친구마저 잃어야만 했던 것일까? 아무 이유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원수가 되어야 하는 이 잔인한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쓰린 가슴을 달래던 나는 각시탈을 쓰고 목단(진세연)을 만났다. 그녀는 드디어 내가 어린 시절의 첫사랑임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지은 죄가 있어 차마 그녀 앞에 얼굴을 드러낼 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건 또 다른 슬픔이었다. 목단은 자기 아버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니 한 번만 아버지를 만나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독립군 대장 담사리(전노민)... 그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형이라면 아무리 위험해도 만날 것이다. 설령 자기가 죽게 된다 해도 죽는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담사리를 도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무릅쓰고 담사리를 만나야 할까? 나는 그를 내 손으로 체포하고 일본 법정에 세워 사형선고를 받게 했었는데, 그의 눈앞에서 각시탈이 벗겨지고 이강토의 얼굴이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정체가 발각된다면 나는 더 이상 일본 순사로 위장하지 못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나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더 급한 일이 생겼다. 종로시장이 통째로 키쇼카이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형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행한 임무와도 관계있는 일이다. 키쇼카이는 자기네 사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조일은행을 강제 파산시키고 조선인들의 예금을 몽땅 가로채려 했는데, 각시탈을 쓴 형이 중간에 돈을 가로채어 시장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던 것이다. (형은 그 임무를 수행하다가 기무라 켄지에게 뒤를 밟혔고, 결국 어머니와 형이 죽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머지않아 그 돈을 남김없이 회수해 갔고, 그것도 모자라 장물취득죄를 적용하여 벌금까지 부과했다. 예금해 두었던 돈마저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시장 사람들은 고액의 벌금을 내기 위해 상가매도증서를 담보잡히고 고리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분을 감추고 고리대금업자로 나선 사람은 조일은행의 조두취였다. 조두취에게 돈을 빌린 사람들은 이제 다 꼼짝없이 가게를 빼앗기고 쫓겨나게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장 사람들은 절규했다. 그 동안에도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취득세, 영업세, 청결세 등 각종 명목의 세금으로 등골이 휘었지만,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위로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살 길이 막막해져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들의 절규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것이 식민지 백성의 비애로구나! 너희에게 우리 조선인은 개 돼지와 같아서,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잡아먹을 뿐, 살거나 죽거나 마음쓰지 않는 거로구나. 진정 제 백성으로 여기고 다스린다면 어찌 이토록 잔혹하게 할 수 있을까? 빛 좋은 허울처럼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게 무슨 소용이더냐? 일본과 조선은 결코 하나일 수가 없다. 너희가 말하는 평화로운 공존이란 조선인들의 희생 위에서 너희들의 배만 불려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조선의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돌아가신 후, 형과 나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인과 이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을 했다. 이강산, 이강토라는 이름에 새겨진 뼈아픈 의미를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일까? 이강토라는 이름을 지니고 친일행각을 하며 동족을 핍박하다니, 어찌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을까?

 

 

느닷없이 금화정에서 회식을 한다기에 연유를 알아보니, 경찰서장 기무라 타로가 조두취를 만나 종로상가를 손에 넣게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금화정에 마련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이 기회다. 조두취의 손에서 상가매도증서를 빼앗아 시장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비록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하루를 숨쉬며 먹고 살 수만 있어도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나는 각시탈을 쓰고 금화정에 잠입하여 조두취를 척살하고 상가매도증서를 입수했다. 그런데 재빨리 탈출하려던 나의 눈앞을 정면으로 막아선 자는 바로 슌지가 아닌가? 설마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이었을까?

 

나는 쇠퉁소를 들어 슌지의 칼날을 막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 오랜 친구의 착한 미소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독하고 차갑게 변해버린 낯선 얼굴이다. 각시탈 속에 숨은 채 그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한없이 슬퍼진다. 이젠 그 누구의 가슴에도 기댈 수 없는데, 끝없이 차오르는 슬픔은 드러난 진실 만큼이나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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