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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팔봉 선생(장항선)은 인상적인 죽음으로 하차하며 성공적인 캐릭터의 대미를 장식했고, 구일중(전광렬)은 시체놀이를 하면서까지 김탁구(윤시윤)를 지키려는 정의의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데도, 어딘가 신비스런 기운까지 감돌면서 구일중 회장의 존재감은 역대 최고로 치솟는 중이네요. 파렴치한 구마준(주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오랫동안 자기를 보좌하며 회사에 열성을 다했던 맏딸 구자경(최자혜)에 대한 배려심은 조금도 없이 모든 지분을 김탁구에게 넘기기로 한 부분에 대해서라든가 등등, 구일중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제가 쓰려는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올해 초에 방송되었던 '추노'의 경우는 선이 굵은 남성 위주의 사극으로서 모든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이 미미했으나 별다른 거부감..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고...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일은 드디어 포문을 열며 실행되고... 이렇게 '추노' 역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궁극적으로 중점을 두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비뚤어진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서로를 미워할 수 없는 그들의 더없이 인간적인 화해와 사랑인지,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추노'는 두 가지를 다 그려내고 있으며, 어느 쪽에 더 비중이 있는지도 시청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결말이 주는 여운은 많이 달라질 듯 싶습니다. 1. 외유내강한 짝귀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포스팅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은 없음에도, 짝..
다행히도 짝귀의 산채를 향해 엄습해 오던 어두운 그림자는 일단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황철웅이 목표로 삼고 있는 이대길과 송태하가 먼저 떠났기 때문이지요. 원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산채는 들이치게 되겠지만, 그 가엾은 사람들이 속 편히 숨 쉬며 살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이틀은 늘어난 셈입니다. 어느 새 언니 동생 사이가 되어버린 언년이와 설화, 그리고 귀여운 원손 아기씨도 그 평화 속에서 며칠은 더 곱게 웃을 수 있겠네요. 1. 두 남자의 이상한 동행 "예전에는 얼굴을 못 보니까 미칠 것 같더니만, 이제는 매일매일 보니까 아주 죽을 맛이야." 하염없이 달만 바라보며 되뇌이는 대길이의 쓸쓸한 얼굴을 보니, 그 사내의 바보같은 사랑에 제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정말 그와 같은 사..
언년아, 어떠하냐? 네 눈에 비친 내 몰골이 어떠하냐? 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그 옛날 풍채 고운 도령은 온데간데 없이, 반은 짐승이요 반은 사람인 괴물로 변해버린 내 몰골이 어떠하냐? 너는 내게 물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이라도 네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느냐고... 내 어찌 잊겠느냐? 네 오라비에게 칼을 맞고 불길 속에 쓰러지는 나를 뒤로 한 채 멀어져가던 네 모습은 지금까지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언년아, 너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하였더냐? 네 오라비 큰놈이보다도 나는 너를 더 미워하였다. 잡아끄는 오라비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던, 연약한 너를 더 미워하였다. 언제나 감싸주고 싶던 너의 가녀린 어깨가, 언제나 꽁꽁 얼어 있던 너의 작고 차가운 손이 그지없이 미웠다. 나를 보며 아스라히 미..
'추노' 12회를 시청하면서 문득 그 작가의 여성관이 궁금해졌습니다. 드라마의 전개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비호감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주인공 언년이의 캐릭터를 보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관계로 리뷰를 쓰면서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를 한동안 고민했으나, 제 느낌에는 혜원이보다 언년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듯하여 앞으로도 계속 언년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추노'에는 아찔할 정도로 멋진 남성 캐릭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대길, 송태하, 최장군은 말할 것도 없고, 악역인 황철웅과 귀여운 바람둥이 왕손이, 궁녀를 사랑했던 우직한 한섬이 등의 남자들이 제각각 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정..
인생이 뭐 재미있어 사나? 다들 내일이면 더 재미있을 줄 알고 사는 거지 '추노'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전에, 그의 인생관이라 할 수 있는 한 두 줄의 대사를 인용해 놓았는데, 저것이 바로 최장군의 캐릭터를 말해주는 대사입니다. 그는 이미 30대 후반의 나이로 대길보다도 한참 손윗사람이며, 원래 신분은 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무과시험에 수차례 낙방하면서 패가망신을 당하고, 목숨을 버리기 직전에 대길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군요. 과거에 낙방해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패가(敗家), 즉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은 금방 나오더군요. 최장군과의 첫 만남을 추억하던 대길의 회상씬에서 등장했던 대길의 대사가 바로 답이었..
오라버니 울지 마소, 이 내 가슴 찢어지네 서늘하던 눈매에서 더운 눈물 넘치는데 이 내 손이 더러워서 닦아주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려니 이 내 속이 무너지네 보소, 대길 오라버니, 울지 말고 나랑 살자 오라버니 웃는다면 무엇이든 못할까봐 매일매일 노래하고 춤도 추고 해금 켜고 꽃이야기 달이야기 도란도란 들려줄게 오라버니 눈물은 우물물보다 정갈하지 한 계집을 십년이나 못 잊는 사내가 어디 있누? 오라버니 버리고 시집간 년 빨랑 잊고 곁에 있는 내 손 잡고 천년만년 같이 살자 당치않은 욕심인 거 너무너무 잘 알지만 아픈 상처 보듬으며 기대살면 아니될까? 정갈한 눈물에야 내 손댈 수 없지마는 피 흘리는 손마디야 잡아주지 못하겠소? 오라버니 원한다면 길쌈하고 빨래하고 밥도 짓고 애도 낳고 내 한평생 그리 살..
드라마 '추노'가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7회는 마치 공들여 만든 한 편의 영화와도 같더군요. 감칠맛 나는 대사와 적절히 어우러지는 가무(歌舞), 게다가 옛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도록 중간중간에 삽입된 고어(古語)들... 그 섬세한 구성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황홀함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송태하(오지호)는 스승이 살해당한 참혹한 현장에서 원수 황철웅(이종혁)과 맞서 싸우다가, 위기에 처한 혜원(이다해)이 부는 호각소리를 듣고 그녀를 구하러 달려갑니다. 소현세자의 유명을 받들고 한시바삐 원손을 구하러 가는 충신인 그가, 어찌 보면 참 한가하다 싶기도 하군요. 게다가 혜원을 잡으러 온 자들은 그녀의 오라버니가 파견한 집안의 호위무사 백호(데니안) 일행이니 실상 그..
아서라 왕손아, 그 손을 거두거라 활활타는 불나방처럼 달려들면 너 죽는다 헛귀로 듣지마라, 이 언니의 충언이다 뜰 안에 핀 꽃은 꺾는 법이 아니니라. 내 뜰 안에 핀 꽃을 내 손으로 꺾었다가 그 후로 십년동안 죽은 몸으로 살아가는 나의 꼴이 안 보이느냐, 정녕 이게 산 것이더냐 곱디고운 가시에 찔려 이내 몸은 시체구나. 칼을 맞고 총 맞아도 두려울게 있겠느냐 개똥밭에 구른다한들 아까울게 있겠느냐 오래전에 죽은 몸으로 버티며 살아감은 삼도하(三途河) 건너기 전에 꼭 한번만 보고지고.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비참한 이내 신세 왕손아, 내 아우야, 너는 보고도 모르더냐 아서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설화(雪花)는 뜨거우니 너의 손을 델 것이다. 눈속에 피어나니, 그 얼마나 뜨거우랴 눈속보다 더 추웠을 ..
보소 보소, 오라버니, 귀찮다 말고 날 좀 보소 핏덩이로 버려진 몸, 길바닥에 버려진 몸 사당패가 주워다가 등골뼛골 다 빼먹어 이내 나이 열일곱에 산속 물속 모두 알고 모르는 것 없지마는 마음만은 순백이네 이내 신세 모질다고 외면일랑 하지 맙소 손 잡아도 추운 세상 혼자서야 어찌 사오? 화살잡이 사냥꾼도 제 품안에 드는 새는 고이고이 품어주어 살리는 게 인정인데 길바닥에 굴렀어도 짐승보다 못하겠소? 날 좀 보소, 오라버니, 곱게 곱게 날 좀 보소 사당패 살이 십수년에 춤을 추고 노래할 제 나를 보던 남정네들 그런 눈빛은 하지 말고 지금 나를 보는 눈에 따뜻함만 더해 주소 욕심없이 나를 보는 사내 눈은 처음이오 나를 버린 아비 어미, 살았다면 그랬을까? 나에게도 오라비가 있었다면 그랬을까? 피붙이의 정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