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반효정 (11)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부모만 자식 때문에 참아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식도 부모 때문에 참아야 하는 거야. 자식이 못났으면 부모가 참아주고 봐주는 것처럼, 부모가 못났으면 자식이 참아주고 봐주면서 그렇게 사는 거야!" 늘상 철없는 할머니라고만 생각했던 김필녀(반효정)의 말이 모처럼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하긴 세상에 자식만도 못한 부모가 어디 한둘이던가?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되 자식만 덜컥 낳아 놓았다고 저절로 인격수양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리 부모가 되었어도 속 좁은 사람은 여전히 속 좁고 무책임한 사람은 여전히 무책임하다. 자식을 키우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자식을 향한 비뚤어진 집착 때문에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금 나와라 뚝딱'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못난 부모들'의..
역시 120부작은 무리였던 걸까요? 명품의 향기를 풍기던 '못난이 주의보'가 늘어지는 전개로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별다른 스토리의 진전 없이 이곳 저곳에서 줄창 모두들 연애 놀음만 하는데, 그 연애 놀음에서 아무런 설렘이나 매력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우선 공준수(임주환)와 나도희(강소라) 커플부터 말해 본다면, 공준수가 자신의 살인 전과를 고백하고 나도희가 그것을 받아들인 후부터 이들의 러브라인은 예전의 설렘과 애틋함을 거의 잃었습니다. 제 생각엔 두 사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반말을 시작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인데요. 계속 존대하면서 약간은 서로를 어려워하는 모습도 남겨 두었더라면 지금처럼 긴장감 제로의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보거든요. 갑자기 나도희가 "연인끼리 반말하는 건 ..
세자빈 화용(정유미)인지, 그 여동생 부용(한지민)인지, 아니면 또 다른 궁녀인지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300년 전의 조선 왕궁에서 연못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한창 젊은 나이의 서글픈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연못에 떠다니던 연꽃들과 평화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은 자기들만의 노래와 언어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겠지요. 하지만 300년 후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냘픈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자동차에 받힌 후 내동댕이쳐진 박하... 그녀가 풍덩 빠져버린 저수지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그 이름도 살벌한 공룡저수지에는 향그러운 연꽃 한 송이 떠다니지 않고,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쳐버린 물고기들은 밤낚시꾼들의 속임수를 피해 꽁꽁 숨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박하의 곁에 다가와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친구는 아무도..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 김상철(정진영) 교수는 어진 의사입니다. 그는 치료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환자일지라도 실낱같은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기꺼이 환자와 함께 싸워주려 하는 의사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성공 가도를 달려온 자신의 의사로서의 명성에 치명적 누를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입장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의사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50대의 나이에도 미혼인 그는 거의 병원에서 생활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자전거를 타고 혼자 사는 작고 허름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들어서는 즉시 대여섯 개의 화분에 차례차례 물을 주고, 우편함에 밀려 있던 편지들을 읽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 목숨을 건지고 새 삶을 살고 있는 환자들의 정이 담뿍 ..
의학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끌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2007년의 '하얀 거탑'이 그러했고, 이제 2011년 초겨울에 새로 시작된 '브레인'이 또한 그렇습니다. 지난 주에 1~2회를 보면서도 느낌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특히 어제 시청했던 3회는 저의 개인적인 기억과 맞물려 상당한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주인공 이강훈(신하균)의 캐릭터에 제가 몰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이 인물에게는 변화가 예정되어 있거든요. 신경외과 전임의(펠로우) 2년차인 이강훈은 개천에서 난 용이며 욕망의 화신입니다. 아직까지는 '하얀 거탑'의 주인공이었던 장준혁(김명민)과 흡사합니다. 모두가 장준혁에게 열광할 때 저는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지요. 의사도 인간이기에 출세하고 ..
이제 70대에 접어든 원로 작가 박정란이 집필한 드라마 중 저의 머릿속에 아직도 강렬히 남아있는 작품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울 밑에 선 봉선화'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보았던 것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시대의 아픔 속에 인간의 섬세한 감정이 진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수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주인공 정옥(김미숙)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했으나 그녀의 두 여동생 정애(권기선)과 정임(전인화)의 삶 또한 극도의 애련함으로 다가왔었습니다. 긴 호흡을 지닌 일일드라마였음에도 시놉과 대본이 매우 탄탄하여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고, 인물 하나 하나의 스토리가 굉장히 역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원로 PD 허환 선생님의 드라마 작법 강의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주 잠깐 박정란 작..
아직 스케줄러 임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송이수(정일우)의 기억이 일부분이나마 확실히 돌아왔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세계에서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이경(이요원)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길래, 그녀만 홀로 남겨두고 죽은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길래 이토록 빨리 기억이 돌아왔을까요? 송이경의 졸업 앨범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자기가 바로 송이경이 사랑한 남자 송이수였음을 알게 된 이후로 스케줄러는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유쾌하고도 시크하던 그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일단 무시하고 넘어갈 법도 하건만, 어차피 스케줄러 임기만 끝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그 때 가서 생각하자 하고 우선은 속 편히 지낼 법도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그러질 못합니다. 잔뜩 고민에 휩..
"49일 동안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세 명을 찾는 거야. 그럼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걸 어떻게 증명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생각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그 증거야. 순도 100%의 눈물 세 방울" 1회에서 억울한 사고로 죽음의 위기에 놓인 신지현(남규리)의 영혼과 스케줄러(정일우)가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신지현은 30명도 아니고 3명의 사랑도 못 받고 사는 사람이 어딨냐면서 자신만만하게 49일 여행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49일'의 시청자라면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엄청나게 고전중이며, 현재로 봐서는 미션에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높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혈육은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그녀의 침상 앞에서 나날이 피가 말라가는 부모의 눈물은 소용이 없지..
오늘 포스팅의 제목을 정할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것 같아서 말이지요. 김태원이 제자들을 선택하는 데에도 분명한 기준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재능을 인정했고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선택했을 것입니다. 재능과 실력도 없어 보이는데 단지 불쌍해 보여서 뽑았다는 식으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그래도 '측은지심'이라는 단어를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보면서 엄청나게 꽂혀버린 단어가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고은성(한효주)은 자기 혼자 버텨내기도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정신을 잃고 길에 쓰러진 장숙자(반효정) 할머니를 보고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며, ..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아름다운 OST들이 있습니다. 이승기의 '정신이 나갔었나봐'에서 풍겨나오는 싱그러운 젊음과 경쾌함도 좋고, 생각지도 못한 노래솜씨를 뽐내는 신민아의 '샤랄라'도 청순한 매력을 그대로 전해 주더군요. 그런데 제 가슴에는 특히 이선희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애절한 '여우비'가 제대로 꽂히고 말았습니다. "난 당신이 자꾸만 밟혀서... 그냥 갈 수도 없네요...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이 사랑에... 내 맘이 너무 아파요..." '여우비'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그런데 "난 당신이 자꾸만 밟혀서... 그냥 갈 수도 없네요" 라는 부분이 끊임없이 저의 머리에, 가슴에, 귓가에, 입가에 맴돌며 왠지 눈물을 차오르게 합니다. 그 사람이 자꾸만 밟혀서 그냥 갈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