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박유천 (9)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세자빈 화용(정유미)인지, 그 여동생 부용(한지민)인지, 아니면 또 다른 궁녀인지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300년 전의 조선 왕궁에서 연못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한창 젊은 나이의 서글픈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연못에 떠다니던 연꽃들과 평화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은 자기들만의 노래와 언어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겠지요. 하지만 300년 후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냘픈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자동차에 받힌 후 내동댕이쳐진 박하... 그녀가 풍덩 빠져버린 저수지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그 이름도 살벌한 공룡저수지에는 향그러운 연꽃 한 송이 떠다니지 않고,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쳐버린 물고기들은 밤낚시꾼들의 속임수를 피해 꽁꽁 숨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박하의 곁에 다가와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친구는 아무도..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유는 오직 하나뿐...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솜털보다 가벼운 영혼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연못에 빠져 죽은 그녀를 보며 눈물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조선의 왕세자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육신을 벗어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끝없이 순환하는 인생의 고리와 그 안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지는 인연들을, 나는 배우지 않았는데도 한 순간에 깨달았던 거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나 놀라움 따위가 아니라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부용을 사랑했으면서도...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처제만 아니었다면, 존귀한 나의 신분으로 꺾지 못할 꽃이 있었..
치열한 수목드라마 전쟁에서 제가 가장 먼저 선택한 작품은 '적도의 남자'였고, 그 다음으로는 '더킹 투하츠'도 놓치기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방송되는 드라마 3편을 모두 챙겨보기는 어려울 듯하여 '옥탑방 왕세자'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었지요. 조선시대의 왕세자가 느닷없이 현대에 뚝 떨어졌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코믹하고 유치할 것만 같아서 별로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말 재방송을 통해 몇 번 곁눈질을 하면서 의외로 무게감도 있고 재미있는 드라마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 이후로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틈나는 대로 즐겁게 시청하던 드라마가 '옥세자'였습니다. 지난 번 '적도의 남자' 리뷰에서도 저의 성향을 밝힌 바 있지만, 저는 한 드라마를 선택하여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스타일의 ..
'글로리아'의 후속작으로 MBC의 새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과 제목은 똑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아무 연관이 없더군요. 가난한 집 아가씨가 부잣집 아가씨를 보면서 "나와 동갑이고 생일도 같은데, 나하고는 너무 달라. 그 여자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이 나..." 라고 말하는 대사가 2회 예고편에 등장했는데, 바로 그 대사가 이 드라마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뒤바뀌었고, 나중에 성장해서야 그 사실이 밝혀진다는 기본적 내용은 역시 식상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오래 전부터 '생인손', '사모곡', '만강' 등의 사극에서 애용되었고, 현대극 중에서도 '가을동화'..
'인생은 아름다워' 후속으로 방송된 '시크릿 가든' 첫방송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존재감을 어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까칠한 백화점 사장 역의 현빈과 터프한 스턴트우먼 역의 하지원도 나름 강렬하게 등장하긴 했으나, 한류스타인 가수 '오스카'와 혼연일체가 된 윤상현의 존재감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오스카의 콘서트 무대는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완벽한 가수의 무대였으며, 윤상현의 소름끼치는 가창력과 무대 매너 또한 탤런트가 연기를 위해 연습한 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짜 가수 같았습니다. 노래 역시 윤상현의 '오스카'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것인 듯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신승훈 급의 중견 한류스타가 콘서트장에서 신곡을 발표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한동안 넋을 ..
'성균관 스캔들'에서 서효림이 연기하고 있는 하효은 낭자는 매우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병조판서 하우규(이재용)의 딸이며 성균관 장의 하인수(전태수)의 여동생이지요. 아버지도 오라비도 진지한 악역을 수행중인데 그녀만 등장하면 삽시간에 이 사극은 오갈 데 없는 시트콤이 되고 맙니다. 처음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자랑하던 효은은, 엄연한 사대부가의 규수가 자기 방에서 속옷 차림으로 외간남자인 이선준(박유천)과 맞닥뜨리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인 유혹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과연 성균관의 신입을 골탕먹이겠답시고 "자기 여동생과 하룻밤을 지내고 오라"는 미션을 던져주는 그 오라비의 누이답게 가볍고 천박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선준은 나중에 미션 수행 실패의 책임을 묻는 선배에게 "부..
'성균관 스캔들' 4회에서는 몇 가지의 주목할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고독한 원칙주의자 이선준(박유천)과 생계형 현실주의자 김윤희(박민영)는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차츰 '내 편'으로 가까워졌고, 주요인물이면서도 3회까지 더벅머리 휘날리며 가끔씩 얼굴 한 번씩 비춰 주시는 것이 전부였던 걸호 문재신(유아인)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문재신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본다면, 저잣거리에서 부랑아로 살던 그를 볼 때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유아인의 곱상한 외모가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그 언밸런스함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성균관에 들어와 단정하게 상투를 틀고 의관을 갖추니 이젠 오갈 데 없는 꽃미남이라, 아무리 버럭질을 하고 난동을 부려도 그 느낌이 별로 살지 않더군요. 선이 굵고 ..
이선준 역을 맡은 박유천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표정이 다양하지 못한 점은 미숙하다 하겠으나, 발성이나 억양 등 대사 연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더군요. 기본적으로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별 것 아닌 말을 하는데도 괜히 몇 차례나 감동을 받았다는..;; 하여튼 경력이 일천한 연기자들은 대부분 표정보다 대사에서 헛점을 많이 드러내는데, 박유천은 연기에 괜찮은 소질을 갖춘 듯하여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은... 박진감이 넘치던 1회에 비해 확연히 지루해진 2회를 보자 조금씩 난감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가더군요. 너무 성급한 우려인지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힘이 딸리기 시작한 것인가 싶기도 했구요. 아무래도 '신데렐라 언니'의 제작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우울하던 용두사미의 기억을..
'성균관 스캔들'은 고요한 밤중에 갑작스런 우뢰 소리처럼, 내 마음을 강렬하게 두드렸네. 이곳에는 치렁치렁한 도포자락에 감싸였을 망정 어린 나무처럼 싱싱한 젊음들이 가득한데, 마음껏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현실의 벽은 지금보다 더욱 높았다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젊음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무기가 아니던가! 아직 연륜이 일천하기에 가진 힘은 없지만, 이들은 당차게 기성세대와 맞서며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네. 1. 김윤희 (박민영) 몰락한 양반가의 장녀이며 당돌한 소녀가장이로세. 아비 김승헌이 노론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명횡사한 후, 가냘픈 몸으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이 처자가 홀로 부양해 왔네. 아무리 가난해도 반가의 규수로서 그 차림 그대로 돈을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