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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고 쓰는 글이기에 '리뷰'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다. 이 글은 리뷰가 아니라 오직 뉴스를 통해 접한 해당 프로그램의 한 가지 문제와 그에 관한 내 생각을 서술한 글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할까 고민했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아서 안 보기로 결정했다. 생면부지의 이성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며 설레고 위로받는다는 설정 자체가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는 허무하다 생각했고, 둘째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만남에도 얼마든지 거짓이 침투할 수 있지만, 자기 실체를 완벽히 숨길 수 있는 전화 통화에서는 그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내 귀에 캔디'는 시작되자 마자 장근석과 유인나라는 출연자를 통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통화와..
추석 특집으로 기획된 2부작 드라마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특이하게도 아침 8시 20분에 편성되었다. 아침 시간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진지하고 무거운 느낌의 멜로였는데 아침에 편성된 것을 보면, 방송사에서는 이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러나 방송 후 시청자의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생각지도 않은 눈물바람을 일으키며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자아냈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과연 이 드라마의 어떤 점이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죽음을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기본적 무게감은 피할 수 없었지만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최대한 가볍고 따스한 터치로 죽음의 무게를 한층 덜어내는 데 성공했다. 스물 일곱, 인생의 봄날 한가운데서 뇌종양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장미..
지금껏 오혜원(김희애)의 삶에 순수란 없었다. 오직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진대,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는지, 음대 재학 시절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재원이었던 오혜원은 건초염 악화로 꿈을 접으면서부터 예고 동창 서영우(김혜은)에게 달라붙어 그 집안의 시녀가 되었다. 서한그룹 회장인 아버지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살아 온 서영우는 걸핏하면 오혜원의 뺨까지 때리면서 모욕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만큼 혜원의 가슴은 무디어진지 오래다. 상처받기 쉬웠던 예술가의 여린 감성은 어느 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혜원..
제가 보기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 8~9회는 다소의 시간 끌기(또는 쉬어가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국의 주중 미니시리즈는 기본이 16회니까 어떻게든 그 분량은 채워주어야겠는데, 이 작품은 원래 기본 스토리가 간략해서 웬만큼 살을 붙이고 옷을 덧입혀도 그만큼 채우기는 빠듯하리라 생각되거든요. 일본 드라마가 거의 그렇듯 원작인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도 10부작으로 종영했고, 문근영 김주혁 주연으로 리메이크 했던 영화는 더구나 총 2시간도 못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16부작으로 늘려 놓으려면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겠죠.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를 왕창 늘려서 지루할 틈이 없도록 하되 원작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거나, 아니면 주어진 얼개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오늘은 그 남자, 오수(조인성)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엔 돈을 목적으로 오영(송혜교)에게 접근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용하려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남자...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껏 사랑하고 싶지만 오빠라는 이름으로 다가갔기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는 갑갑하고 슬픈 운명... 그 누구보다도 가감없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오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 슬픔과 두려움은 남들보다 훨씬 더 크고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10년 전에 죽은 옛사랑 문희주(경수진)를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니, 오수 이 녀석의 인생도 참 고달프기 짝이 없군요.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아 왔지만 이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모처럼 사람답게 살..
주인공 김선우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역할이니, 이장일이라는 캐릭터가 근본적으로 아주 선한 인물일 수는 없었습니다. 김선우의 선량함이 부각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이장일은 악역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요즘의 악역은 예전과 달리 무척이나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고뇌하는 모습은 연민을 불러 일으킵니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선량한 주인공보다, 오히려 야누스적인 내면과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악역 캐릭터에 많은 시청자는 열광하곤 하지요. 이장일은 분명 그런 캐릭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의 축'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견탤런트 김영철이 연기하고 있는 진노식 회장이 그 인물이죠.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