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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처럼 뜨겁기보다는 물처럼 유연하게... 본문

천주교 관련 글

불처럼 뜨겁기보다는 물처럼 유연하게...

빛무리~ 2009. 8. 2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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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희 본당에 계셨던 보좌 신부님 중,

개신교회 출신으로 일반 대학을 마치고 사회생활까지 하시다가

돌연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좀 늦은 연세에 서품을 받으시고, 처음 저희 본당으로 부임해 오셨던

한 열정적인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 신부님의 모습 중 지금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성금요일 예절을 시작할 때, 제단 앞으로 걸어나오시자마자

온 몸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시던 자세였습니다.

다른 본당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 본당에서는 다른 어떤 신부님에게서도

성금요일 예절 때에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낮은 자세가 왠지 가슴 아리고 찡해오는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성당 안에서 감실을 마주하고는

깊은 침묵 중에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는 신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청년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베드로 신부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청년 활동 지도에 있어서도

각별한 열정과 추진력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성가대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당신의 개인적인 친구분까지 불러다가

(그 친구분은 성악전공자로, 강습료 없이 불러오기는 힘든 분이라더군요^^)

매주 연습시간마다 지도를 부탁하시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도 신부님의 열정은

그리 쉽게 신자들 사이로 쏙쏙 스며드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실력 위주로 타이트하게 조여들어오는 성가대 연습이 부담된 청년들은

더 열심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슬금슬금 연습에 빠지기 시작했고

나중엔 너무 썰렁해서 제대로 연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특별히 부탁해서 친구를 불러오신 신부님의 입장은 매우 난처했을 것입니다.

 

우리 성가대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청년들만이 아니라 장년층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부님과 신자들은 부드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삐걱거렸습니다.

 

 

매사에 열정적인 개신교인들과 달리

어딘가 느긋하고 물렁하게 퍼져 있는 것도 같은 우리 성당 신자들의 모습이

신부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지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은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지쳐가시는 모습이 역력히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성당에서, 마음껏 열정의 나래를 펼치고자 하셨으나

도무지 열정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설렁설렁한 신자들이

뜻한 바대로 따라와주지를 않으니 기운이 빠지실만도 했겠지요.

 

그 와중에 저는 성가대 활동과 병행하여, 미사해설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다른 몇몇 청년들과 더불어 베드로 신부님께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가대에서는 신부님과 같이 하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몰랐던

신부님의 또 다른 모습을 그 자리에서 많이 보았었습니다.

 

모인 자리에서 신부님은 항상 서릿발처럼 얼굴을 차갑게 굳히신 채로

한 명 한 명 지적하시면서 교리나 성서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하셨는데

거의 제대로 대답하는 청년들이 없었던 것이

천주교 신자로서 기본상식이라고 하기에는 꽤 어렵다 싶은 질문들이었던데다가

신부님의 태도가 너무도 굳어 있다 보니, 청년들은 머뭇머뭇 쩔쩔 매기만 할 뿐,

원래 알았던 내용인데도 그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때문이었습니다.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그런 식이고 보니, 신부님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지고

매번 날카로운 질책과 더불어 호된 꾸지람만 실컷 들었을 뿐,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청년들에게 매주 그 자리는 참 부담스러운 고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 자리에 나오신 신부님은 자리에 앉으시기도 전에

"오늘의 복음 말씀을 미리 읽고 나온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언제나처럼 몸이 굳어서 다들 뻣뻣했던 것인지,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냉랭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저도 이젠 더 이상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긴 수단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휙 나가 버리시더군요.

 

사실 그 전까지도 저는 베드로 신부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섭긴 했지만, 하느님을 향한 그 열정적인 마음이 너무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신자들의 존경을 받으실만한 신부님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의 신부님 모습은 제 마음 속에 매우 큰 상처를 남겨 주었습니다.

 

.............

 

몇 년 세월이 흐른 후에, 베드로 신부님께서

사제복을 벗고 일반인의 신분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뜻밖이었지만, 가만히 예전을 돌이켜 보니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급격히 지쳐가시던 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 신부님은 신자들과 더불어 그 흔한 술자리 한 번 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럴 시간에는 홀로 조용히 기도를 하시거나, 무언가 열심히 계획을 세우시곤 했지요.

 

그러나 신자들은 앞서 나가시는 신부님의 뒤편에 멀찌감치 처져서

서로들 술잔을 부딪히고 수다를 떨며 그 안에서 자기의 신앙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사제직은 소명이라, 인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아마도 그 베드로 신부님은 평생의 사제직으로 부름받지는 못하셨던 것이겠지요.

 

..............

 

 

언젠가 이 게시판에서 조승연 자매님의 "얇고 길게 믿는 사람"이라는 글을 읽고

매우 공감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열심한 사람보다 오히려 느긋한 듯 얇게 믿는 사람들이 오래 간다는...

 

그것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너무 뜨거운 열정과 욕심으로 앞서 나가다 보면

얼마 못 가서 기진맥진해지고,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들도 점점 줄어들어,

끝내는 오히려 원하던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

 

 

세상 어디에서나 잘못된 것은 눈에 띄게 마련이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올바른 뜻과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불길같이 급하게 타오르는 방식으로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히고

뜻한 바를 이루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때로는 열정이 필요하되 그 뜨거움을 잠재울 수 있는

흐르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이,

점점 어지러워지는 이 험난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소중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는 한 방법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이,

나의 신앙이 아무리 미약하고 가느다랗게 흐르는 물줄기와 같다 해도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도록 해야 하겠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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